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건, 그 사회 안의 권력에 순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강한자와 약한자를 분류하고 강자에게는 지배의 기술을 가르치고 약한자에게는 순종의 마음가짐을 가르친다.
양녕과 같이 지배해야 할 자가 지배를 거부하고, 동학과 같이 순종해야 할 자가 반항할 때 세상은 그들에게 낙오자, 역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문명사회,
법과 질서가 그 사회를 지탱해주는 이 문명사회에서도, 이 힘의 논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지켜지고 있다.
우행시는 바로 그런 의미에 사회의 낙오자에게 세상이 어떻게 폭력을 강요하는지를 보여주고있다.
사형수를 의미하는 붉은 글씨를 가슴에 품고 있는 한 남자.
그는 단지 빨리 죽기만을 바란다.
세상에 어떤 미련도 없고, 사회에 지은 죄에 반성도 없다.
그런 그에게 사회는 죽음을 명했지만,
그가 그렇게 마음 편히 가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마음에 혼란을 심는다.
세상에 미련을 심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심는다.
가증스러운 것은,
그 방법이 너무도 달콤하다는 것이다.
그에게 익숙한 질시와 멸시의 손가락질이 아닌,
그가 그리도 갈구할 때는 외면했던 ‘정’을,
그가 세상을 향한 미련을 버린 후에야,
억지로 그의 안에 쑤셔박아 버린다.
그렇게 세상과 그를 연결해 버린다.
그래서 세상은 잔인하고,
그래서 이 영화는 잔인하다.
필요할 때 필요한 것을 주지 않고,
원하지 않을 때 원했던 것을 줌으로써,
그의 안에 미련을 키운다.
그리고
그가 그 온기에 안주 할 때,
그 손안에 있던 작은 온기조차 빼앚아 간다.
마음에 미련은 남기고,
그 미련에 붉은 상처 자국 하나를 남긴다.
그리고 그것을 ‘선행’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 해 버린다.
당사자가 피를 흘리건 말건,
내가 한 영혼을 구원했노라며,
그렇게
스스로 내적 허영의 포만감을 느끼며,
차갑게 등 돌려버린다.
그래서 이 영화는 잔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