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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미 Jun 26. 2024

처음 느껴본 여행의 맛

낯선 이들과의 조우

제주도에 와서 가장 하고 싶던 건 자전거를 타는 것이었다.


2007년 즈음, 한 명을 시작으로 제주도 자전거 하이킹이 친구들 사이에서 대유행을 했다.

너도 나도 가겠다고 봄이고, 가을이고 떠났다. 나 역시 밀릴 수 없어서 동참했다.  

4박 5일 동안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를 달리고 또 달렸다.

돌아보면 어떻게 그걸 해냈을까 싶기도 한데, 당시에는 ‘해내야만 한다’는 나름의 미션이 있었던 것 같다.

결국 완주증을 받았고, 건네받은 완주증에는 우도를 포함해 222km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힘든 기억인 것은 맞지만, 나름 자전거 투어가 꽤나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제주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비도 맞고, 함께 간 친구와 싸우기도 하고, 밤에 햇반에 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었던 밥도 꿀맛이던. 그 기억이 강렬한 까닭이겠지.

매일 저녁 물집 잡힌 발에 연고를 흠뻑 바르고, 터질 듯한 종아리 마사지는 물론이거니와 중문으로 넘어가는 죽음의 안덕계곡도 그리움이다.

그래서 이번 제주도 여행에서는 반드시 자전거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려보겠다 다짐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제주도는 장마 기간이다.

여행도 좋아하지 않는 내가, 갑작스러운 일상의 여유와 공백으로 무려 장마철에 이 먼 여정에 나선 것이다.

어차피 가는 거 비 맞는 것쯤은 감수하겠다 다짐하고 출발했는데, 제주공항을 나서자마자 코 끝을 타고 올라오는 습한 공기에 식겁했다.


그래도 사람이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짐을 풀고 숙소 근처의 자전거 렌탈샵을 찾았다.

한 두 방울 비는 떨어졌지만, 자전거 타기에는 무리가 없을 것 같아 렌탈샵 앞에 있는 CU에서 우비도 샀다.

좋아. 모든 준비는 끝났어.

렌탈샵 문을 박차고 들어가 외쳤다. “자전거 빌리러 왔습니다!”

“손님, 우리는 전기 자전거라 비가 오면 렌탈이 어려워요 “


네? 비를 맞는 걸 감수하고라도 자전거를 타려고 했는데. 비가 오면 자전거 렌탈이 안된다고요?

생각지도 못했던 시나리오에 약 3초가량 사장님과 내 사이에 마가 떴다. 당황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있었다.

이유를 확인해 보니, 내가 자전거 투어를 하던 10여 년 전에는 일반 자전거가 렌탈의 기본이었지만

최근 2-3년 사이에 전기 자전거 렌탈로 대세가 바뀌었단다.

전기 자전거는 충전단자에 물이 들어가면 고장 날 수 있어 비가 오면 렌탈 자체를 진행하지 않는다고.


하. 이러면 안 돼.

사장님께서 비가 그치면 렌탈이 가능하니 연락처 남기고 가라고 말씀해 주셔서, 전화번호를 알려드리고 돌아섰다.

계획이 완전 틀어졌다. 이 시간에 난 자전거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려야 하는데.

아쉬운 마음에 근처 카페라도 추천받고자 사장님께 “혹시 갈만한 카페가 있나요? “하고 여쭤봤다.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은 “우리 카페도 하는데”



그렇다. 나는 지금 렌탈샵 사장님이 운영하고 있는 렌탈샵 구석의 카페에 앉아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무도 없는 가게를 홀로 지키며 말이다.

사장님은 내게 커피 한 잔을 후딱 내려주시고는 자전거 수거를 하고 오겠다며 잠깐 가게를 맡기고 떠나셨다.

이 상황에 실없이 웃음이 나기도 하는데, 일면식도 없었던 사장님의 가게에서 이렇게 편하게 앉아 글을 쓰고 있다.


이번 제주도 여행은 묘하게 재밌게 흘러간다.

파워 E인간이지만 낯선 사람과 말을 섞는 걸 무서워하는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제 그런 것도 없어진 듯하다.

오히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아이스 브레이킹을 해보고, 이어지는 소소한 대화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

슬리퍼를 사러 들어간 매장에서는, 우연찮게 갓 들어온 신입 매장 직원의 마수걸이를 도울 수 있었고,

제주도에 도착해 처음 간 식당 사장님과는 마치 오래 알던 친구인 양 키워드 몇 개로 대화의 합을 맞추는 짜릿함도 느꼈다.

내가 먼저 대화 주제를 꺼내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들이다.


무엇보다 숙소로 이동하는 택시에서 기사님과 나눈 대화의 잔상은 오랫동안 남을 듯하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몇 마디 말을 나누고 감히 평가할 수는 없지만, 건전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분이라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저는 마음가짐, 계획, 목표도 뚜렷하고 호기심도 넘치지만 용기가 이걸 뛰어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늘 코 앞에서 포기를 했었는데, 그게 지금은 가장 후회가 돼요.

근데 요즘에도 그래요. 나중에 또 후회할걸 알면서도 포기를 먼저 하게 되더라고요. “

나도 모르게 툭 전하게 된 지금 내 마음.


가만히 들으시던 기사님은 본인의 경험을 빗대어 조언을 해주셨다.

어릴 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실질적인 가장이 돼 일찍이 회사에 다니면서 동생들의 공부 뒷바라지만 하셨다는 기사님.  

동생들은 지금 전문직으로 서울에서 떵떵 거리며 살고 있지만 그런 동생들을 볼 때마다 요즘에는 뿌듯함보다 부러운 마음이 더 크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 도전에는 나이가 없으니, 할 수 있다는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가능한 거 아니냐’ 며 본인께서도 공부를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는 말씀도 해주셨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뭐든 시작해 보라고 말이다. 절대 늦지 않았다고.


맞다. 그렇네. 나, 아직 젊잖아.

삶을 단순하게 살아보자 마음을 먹었지만, 여전히 남의 눈치를 보면서 세상의 기준을 버리지 못한 채 혼자 복잡했을지도.


여행이 재미있는 이유가 이런 걸까. 생각하지 못한 신박한 우연이 설레기도 하면서 기분이 좋게 만든다.

출발 전까지 귀찮기도 하고, 비 소식에 심난해서 온갖 핑계를 대며  안 갈 이유를 찾았었다.

그런데 웬걸. 내가 오지 않았다면 이런 즐거운 만남과 깨달음 따위는 없었겠지.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렌탈샵에 방금 한 손님이 자전거를 반납했다.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여행 즐겁게 하세요”라고 먼저 인사를 건네 보았다. 손님도 돌아보며 “감사합니다. 즐거운 여행되세요 “하며 답을 해줬다.

그리고는 비가 오락가락하지만 많이 오진 않아서 자전거 타는데 무리는 없을 거라고 안전 운전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면, 이 얘기도 들을 수 없었겠지.


뭔가 즐거운 일이 있을 것만 같은 여행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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