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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미 Jun 20. 2024

엄마, 비행기 탈 때 신발 벗어야 돼

비행기는 딸이 태워준다.

오랜만에 제주도 여행을 계획 중이다. 긴 휴식이 주어지니 제일 먼저 떠오른 곳이었다. 요즘 제주도 물가가 비싸져서 그 돈이면 제주도를 가는 것보다 해외여행 가는 것이 더 낫다고는 하지만, 해외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제주도가 최고의 힐링 여행지다.


제주도 방문이 간만이라 신나게 준비를 하다 예전에 제주도에서 찍어둔 사진을 보게 됐다. 겹겹이 쌓인 사진들 속에서 잠수함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맞아. 엄마랑 제주도 갔었지. 그게 벌써 10년이 넘었네. 엄마와 딸이 처음으로 함께 떠난 여행지였고, 엄마 인생의 첫 비행기를 탔던 때이기도 하다.


당시 나는 업무로 제주도 출장이 잦았는데, 한 번은 비행기를 타러 가는 내게 엄마가 말했다. "딸, 좋겠다. 엄마도 제주도 가고 싶어"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버는데 그깟 제주도 한 번 같이 못 가겠나. 처음엔 엄마에게 비밀로 하고 제주도 티켓부터 끊었다. 그리고 호텔 방을 예약했다. 코스도 혼자 짜려다가 엄마 취향에 안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출발하기 열흘 전에 여행 계획을 오픈했다. "엄마, 우리 제주도 가자"


비싸니까 취소해라, 피곤할 것 같다, 온갖 핑계로 딸의 돈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 버텼다. "회사에서 나온 보너스로 가는 거야"라는 나의 새빨간 거짓말을 듣고 나서야 마음이 풀어지며 제주도 여행 준비에 동참했다. 그날부터였을까.  매일 저녁 엄마에게 브리핑이 시작된 것 같다. 숙소, 이동 차량, 먹거리, 즐길거리 등. 엄마가 컨펌하지 않으면 취소하고 다시 알아봤다. 처음에는 짜증도 나고 귀찮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도 뭔가를 처음 할 때 실망하지 않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하지 않는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며 버텼다.


여행을 떠나기 한참 전부터 엄마는 저녁마다 소녀처럼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여행 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주변 사람들이 엄마에게 여름휴가 계획을 물으면 "우리 딸이랑 제주도 가요. 딸이 다 예약해 줬어"라며 자랑도 했다. 번지르르한 럭셔리 여행도 아니고, 고작 국내 여행에 제주도 정도 가는 건데 딸과 단 둘이, 그것도 제주도를, 무려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게 엄마에게는 기쁨이었나 보다.


어릴 때 읽었던 책에서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비행기는 딸이 태워준다"라는 글귀가 있어서 엄마한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또 했다. 물론 여행을 준비하면서도 역시 비행기는 딸이 태워주는 거 맞지? 라며 내가 알아서 생색은 다 냈다. 비록 엄마는 첫 제주도 방문이라 기본적인 관광지는 가봐야 하지 않겠냐고 수행여행 코스로 일정을 짰고, 엄마 혼자 독박운전을 해야 했지만, 그래도 엄마가 원했던 잠수정 투어를 예약했으니 엄마는 그거면 됐다고 했다.


비행기를 타는 날, 체크인을 위해 서 있는데 옆에서 엄마가 친구들에게 제주도 간다며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마냥 신나 있는 엄마를 보고 있자니 문득 장꾸미가 발동했다. 너무 장난이 치고 싶었다.


"엄마, 비행기 탈 때 신발 벗어야 돼. 알지? 처음 타는 사람들이 실수 많이 하더라"

"저번에 어떤 아저씨는 신발 못 벗는다고 버티다가 쫓겨났어"

"양말 신었어? 비행기에서는 양말이 예의야. 엄마 샌들 신었으니까 지금 빨리 양말 신어."

"아, 맞다. 이따가 비행기 타서 앉아있을 때 승무원 지나가면 일어나서 좌석번호랑 이름 큰소리로 말해야 돼. 출석체크 하거든"

 

웃으면서 듣고 있던 엄마. 분명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으로는 쌍욕을 퍼붓고 있었다. 진짜로. 그러고는 나에게 "내가 바보냐?"라며 어깨를 꼬집었다. "내가 사람 많아서 참는드..."는 말과 함께. 나는 엄마의 표정과 반응이 너무 웃기고 재밌어서 한참을 깔깔거렸다.


약 10년 만에 떠나는 제주도. 그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고, 달라졌다. 엄마랑 함께 갔던 식당은 아무리 검색해도 나오지 않았고, 엄마와 다녀온 수학여행 관광지는 이제 사람들에게 잊혀 가는 곳인 듯했다. 보고 즐길 건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지만, 묘하게 아쉽고 슬프다.


그래도 너무 다행인 건 이렇게 엄마와의 여행을 통해서, 둘만의 추억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때의 에피소드를 하나 둘 떠올리면 엄마가 없어도 같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좋다. 빠른 판단력과 추진력으로 티켓을 끊고, 엄마 손을 이끌어 제주도로 떠난 과거의 나를 칭찬한다.


아마 앞으로 그 어떤 좋은 곳을(가본 적은 없지만) 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내 최고의 여행지는 제주도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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