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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공 Aug 19. 2023

자나 깨나.. 마취과

마취, 그거 재우면 끝 아닌가요?

마취과의사 보신 분?


살면서 마취과의사를 만나는 일이 얼마나 될까.

요즘이야 마취'통증'의학과로 외래에서 환자들을 만나는 일이 많아졌지만

그전까진 수술실에 들어가는 일이 있어야만 만나는 미지의 의사였다.

의학드라마에서도 다급하고 피 튀기는 서전(surgeon, 수술하는 의사를 통칭)들 이야기만 나오지

수술실의 마취과 의사를 다루는 내용은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통증클리닉이 활성화되기 전까지 마취통증의학과는 크게 인기 있는 과가 아니었고

의사들 사이에서도 "마취과? 걔네는 맨날 환자 재우고 놀잖아. 맨날 자기들 맘대로 방도 안 열어주고"라는 인식이 여전하다.



그래서 뭘 하는데요..?


환자가 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실에 들어가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수술대기실에 입실한 순간부터 병실로 돌아가기 전까지 환자는 수술센터 내에서 치료를 받게 되는데

이 모든 과정 동안의 환자 안전관리를 마취통증의학과에서 담당하게 된다.


수술과 마취 준비가 되면 환자를 수술실로 입실시키고 환자확인, 수술부위 확인을 한 뒤 마취를 시작한다.

마취도 의학의 한 분야인만큼 이 지면을 빌어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쉽게 말하자면 

'사람이 잠을 자면서 칼에 찔려도 아파서 깨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기억도 나지 않은 데다가 수술 후에 온전하게 다시 일어나고 최소한의 통증 상태로 만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다'는 것 정도만 우선 알고 있어 주시길.

이때 환자에게 사용하는 약물, 기구, 기계와 수술방 인력 등 대부분을 마취통증의학과에서 관리하고

당연히 마취되어 있는 환자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감시하며 수술실을 운영한다.


수술이 끝나면 수술이나 환자 상태에 따라 회복실이나 중환자실로 환자를 이송하는 데

회복실은 마취과가 관리하는 병동이라고 생각하면 되고 때에 따라 중환자실 환자도 마취과에서 보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마취통증의학과 의사 중에 중환자의학을 세부전공으로 하는 의사들도 많이 있다.


통증클리닉은 정형외과, 신경외과, 재활의학과 등에서도 많이 운영하지만

수술 전후 통증, 암성통증, 급만성통증은 어찌 됐든 마취통증의학과 소관이다.


내과의사? 병 고치는 의사. 외과의사? 수술하는 의사.라고 뭘 하는지 대충은 알고 있지만

마취과의사는 정말 환자 재우는 거 말고 뭐 하는 의사들인지 나도 마취통증의학과 수련을 받지 않았으면 이렇게 많은 일을 하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몰랐을 테다.


레퍼런스 체크


소위 '레퍼런스 체크'라는 게 있다.

어떤 사람이 회사나 팀에 합류하기 전에 어떤 사람인지 평판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마취통증의학과라는,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과에 들어오고 나서 배워야 할 분야들이 너무 많다 보니

내 스스로 마취과에 대한 레퍼런스 체크가 필요해서 책을 많이 찾아봤는데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던 글이 박완서 작가님의 글이다.


(전략)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이에 대해 과연 무엇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아들이 인턴 과정을 끝마치고 전문의는 무슨 과를 택할까 의논해 왔을 때 생각이 났다. 

그애는 나만 반대하지 않는다면 마취과를 하고 싶다고 했다. 뜻밖이었다. 

나는 아들로 인하여 자랑스럽고 우쭐해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누가 시키거나 애써서가 아니라 그애 스스로가 선택한 학교나 학과가 

에미의 자긍심을 충분히 채워주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으레 그러려니 했다. 

내 무지의 탓도 있었지만 마취과는 어째 내 허영심에 흡족치가 못했다. 

나는 왜 하필 마취과냐고 물었다. 그애는 그 과의 중요성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런 식으로 말해서 중요하지 않은 과가 어디 있겠니? 

이왕 임상을 할려면 남보기에 좀더 그럴 듯한 과를 했으면 싶구나." 

나는 내 허영심을 숨기지 않고 실토했다. 그때 아들의 대답은 이러했다. 


"어머니, 마취과 의사는 주로 수술장에서 환자의 의식과 감각이 없는 동안 

환자의 생명줄을 쥐고 있다가 무사히 수술이 끝나고 의식이 돌아오면 별볼일이 없어지기 때문에 

환자나 환자 가족으로부터 고맙다든가 애썼다는 치하를 받는 일이 거의 없지요. 

자기가 애를 태우며 생명줄을 붙들어준 환자가 살아나서 

자기를 전혀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쓸쓸한 일이겠어요. 

전 그 쓸쓸함에 왠지 마음이 끌려요." 


그 아들에 그 에미랄까, 

나 또한 아들의 마음이 끌린 쓸쓸함에 무조건 마음이 끌려 그애가 원하는 것을 쾌히 승낙했다. 

늘 사랑과 칭찬만 받으면서 자라 명랑하고 거침이 없고 

남을 웃기기 잘하고 농담 따먹기에 능하던 아들의 전혀 새로운 면이었다. 


나는 그때 아들에 대해 새롭게 알았다. 

품안의 자식인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알아버렸다가 아니라 

알아야 할 무진장한 걸 가진 대상으로 우뚝 섰을 때 얼마나 대견했던지, 

그리고 그때의 그 앎의 시작에 대한 설레임까지 

꼬바기 밝힌 새벽 빛 속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1994)


이 책이 위에 나온 아들의 사망 후에 쓴 글이라는 걸 알게 되면 처음부터 다시 읽게 되겠지만,

아무튼.



텐팅(수술포) 뒤에 사람 있어요


저 글을 읽고 생각난 한 그림이 있는데 바로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1818)이다.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Wanderer_above_the_Sea_of_Fog


높은 곳에 올라 바다인지 산인지 모를 정도로 자욱이 뒤덮인 운무를 바라보는, 

더 먼 곳을 내다보기도 가까운 곳을 살펴보기도 해야 하는 그림 속 방랑자의 모습이

마치 수술포 뒤에서 모든 것을 관망하며 모든 것을 찾아야 하는.. 마취과 의사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외과의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쩔 땐 아무리 환자에게 잘해줘도 칭찬합니다 카드를 받을 수 없는 유령 같은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고

수술 중에는 수술포 뒤에 아무도 없는 취급을 받을 때도 있지만,

또 가끔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느낌으로 의식이 없는 환자와 씨름하는 그 쓸쓸함이

나를 고통스럽게 할 때도 분명히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취과의사는 여기에 있다.

환자와 수술실을 지키는 의사로.



그래서.. 마취과의사 보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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