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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 May 28. 2024

나에게 의리란

의리로 결혼했어요

한 친구는 ‘의리’라는 단어가 싫다고 했다. 깡패들끼리의 의리가 떠오른다고. 



깡패 사이 의리는 맹목적으로 보여 나도 싫다. 나에게 의리는 한결같음인데, 상대가 먼저 나를 싫어하지 않는 한, 못 생겼다거나 돈이 없다거나, 상대가 팔남매 중 유일하게 대학을 나왔다거나, 아버지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돌아가셨다거나 심지어 그의 어머니가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이유로는 이별을 떠올리지 않는 마음이다. 



데이트할 때 갈 곳이나 먹을 음식을 미리 알아볼 줄 모른다거나 같이 볼 영화를 예매한 적이 없고 같이 있으면 그다지 재밌지 않다는 이유로도 이별을 떠올리지 않는 마음이 내가 생각하는 의리다.



그에게 결정적 결함이 발생하지 않는 한, 즉 폭력을 행사하거나 폭언을 하거나 생활력이 없으면서 의존적이거나 내 아빠를 닮은 가부장적 권위를 들키지 않는 한 그가 싫어지지는 않을 것이고 그래서 내 쪽에서 이별을 통보할 일은 없는 마음이다. 



그러다보니 그가 “우리 언제 결혼할까?” 물었을 때 프러포즈를 건너 뛰고 결혼 절차로 들어갔음을 결혼 후 어느 날 문득 인식하곤 억울했다. 그러다 억울한 마음이 가부장제에 ‘감염된 각본‘에서 나온 것이 아닐지 부끄러워졌다. 부끄러워진 이후로는 ‘프러포즈도 없이 결혼했다’는 사실은 그를 구박하며 툴툴댈 명분의 지위를 잃었다.



 ’나는 의리로 결혼했어. 이 의리는 변치않아.‘라고 한번도 그에게 말하진 않았다. 타인들에게 의리를 사랑 자리에 놓았을 때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도 타인들과 크게 다를 거 같진 않아서. 하지만 나의 의리는 타인의 사랑과 밀도 면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다고 자신한다. 사랑 없이 의리만으로 결혼한 것도 아니다. 


우정의 자리에 의리를 두어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절친과의 의리는 우정과 같다. 의리라는 단어에 대한 느낌이 나랑 다를까 봐 안전하게 우정을 고르고 사랑해~하고 말한다. 의리해~라는 말은 없는 게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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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된 각본'은 김소연 시인이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에서 사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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