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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신 Nov 01. 2022

뽀르 파보르

[엽편소설]

친구와 내가 뜨겁고 붉은 아타카마 사막을 지나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에 도착한 날은 코로나19가 세계를 강타하기 1년 전이었다. 페루, 볼리비아를 거쳐 칠레에 이르기까지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나 아르마스라는 이름의 광장이 있었다. 처음엔 잘못 들었나? 생각했고, 나중엔 의아했다. 같은 이름의 광장을 중심으로 관공서와 성당, 박물관 같은 유적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 역시 신기했다. 사전을 찾아보았다. ‘아르마’는 무기라는 뜻이었다. 무기고가 있는 곳이 도시의 중심이 되었거나, 도시의 중심에 무기고를 만들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연유로 산티아고에서도 너무나 당연하게 제일 먼저 아르마스 광장으로 갔다. 산티아고라는 단어에서 내가 성스러운 느낌을 받은 건 ‘스페인 하숙’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소개되었던 산티아고 순례길 때문일 것이다. TV를 보며 친구가 “우리도 언젠가 저 길을 걷자.”라고 말했지만, 실현 가능성은 미지수였다. 친구는 곧 공무원이 될 테지만 나는 백수이기 때문이다.

3년 동안 다니던 중소기업을 때려치우고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자고 부추긴 사람은 나였다. 친구는 합격했고 나는 떨어졌다. 친구는 희망을 획득한 기념으로, 나는 희망을 기약하기 위해 함께 떠나온 여행이었다.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는 마추픽추와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이라는 우유니 소금사막과 홍학이 노니는 붉은 호수는 지출에 대한 부담을 상쇄하고 남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산티아고의 하늘은 쨍 소리가 날 것처럼 맑았고 햇볕은 따가웠다. 아르마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유적지를 둘러본 우리는 광장에서 뻗어나간 길을 따라 걸었다. 초록 잎이 무성한 가로수와 맑은 물이 솟는 분수를 끼고 노천카페가 늘어서 있었다. 나무로 만든 직사각형 화분들이 카페의 파라솔과 보도를 구분 지었다. 화분에 핀 색색의 꽃들 때문인지 공기 중에는 생기와 낭만이 넘쳐흘렀다.

“우리도 맥주 한 잔 마시고 가자. 다리 아프다.”

친구가 다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빈 의자를 찾아 털썩 주저앉은 친구를 두고 내가 주문을 하러 갔다. 미국 아래 있는 나라이니 누구나 영어를 잘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영어도 달러도 통하지 않았다. 국경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은 환전이었다. 현지 화폐가 없으면 생수 한 병 살 수 없었다. 

“세르베자 드 바르리, 도스(생맥주, 두 잔).”

생존을 위해 익힌 스페인어로 주문을 하고 맥주 두 잔을 받아들었다. 산뜻하고 청량하게 목을 넘어간 맥주는 기분 좋게 톡 쏘는 맛을 남겼다. 파라솔 밑에 앉아서 산들바람을 맞고 있자니 그냥 이곳에 눌러앉고 싶었다. 남미는 정세가 불안정하고, 치안이 좋지 않고, 경제 사정도 나쁘다는 뉴스와 달리 여유롭고 포근했다. 하늘은 맑고 공기는 깨끗하며 물가는 쌌다. 먹거리 물가는 서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서울에 가기 싫다고 말하려는 찰나 옆 테이블에 있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안경을 쓴 오동통한 백인 남자였다. 오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의 아랫배가 개구리 뺨처럼 귀엽게 불거져 있었다.

“아 유 제패니즈?” 

“노, 노. 위 아 코리안.” 

“아이 노우 닌자. 산티아고 이즈 뷰티풀 시티. ” 

남자는 자부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닌자를 안다고 말했다.

“일본 사람이 페루 대통령 한 적 있어. 우리를 일본 사람으로 아나 봐.”

친구가 내게 말한 후 다시 한번 남자를 향해 말했다.

“위 아 코리안.” 

나는 손뼉을 치며 오 필승 코리아를 불렀다. 붉은 악마처럼 머리 위로 뿔 모양도 만들었다. 남자가 허리춤에서 칼을 뽑는 시늉을 하며 “닌자”하고 말했다. 아, 어떻게 설명하지? 이번에는 일어서서 말춤을 추며 싸이의 강남 스타일을 불렀다. 남자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장단을 맞췄다. 내 눈을 들여다보던 남자가 말 타는 시늉을 하더니 다시 한번 칼을 뽑았다. 그리고 닌자라고 외쳤다. 닌자에 대한 남자의 인식은 언어나 인종의 벽보다 견고했다. 

짜증 난 얼굴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켠 친구가 거칠게 일어섰다. 파라솔을 지나 보도 위로 나가더니 방탄 소년단의 페이크 러브를 안무를 곁들여 불렀다. 맥주를 마시던 사람들이 휘파람을 불며 손뼉을 쳤지만 남자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친구는 화가 났는지 남자에게 등을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중년 남자니까 방탄소년단을 모를 수도 있지.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최근에 전 세계 매체가 우리나라에 관한 보도를 했다면 어떤 것을 했을까? 김정은과 트럼프의 회담은 분명히 뉴스를 탔을 것이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미국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를 아느냐고 물었다. 서바이벌 스페인어가 바닥이 난 터라 가능한 한 쉬운 영어를 골랐다. 트럼프가 로켓 보이라고 불렀던 사람이 있는데, 바로 그 김정은과 만났다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대한민국의 판문점에서 만난 트럼프와 로켓 보이가 악수했다고…. 안경 속에서 남자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이제 됐구나, 생각하며 이번에는 코리아라고 하지 않고 사우스 코리아, 꼬레아 델 수르. 낫 노스 코리아, 노 꼬레아 델 노르떼 라고 한 음절 한 음절 분명하게 영어와 스페인어로 발음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와 내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말했다.

“뽀르 파보르” 

뽀르 파보르는 영어 플리즈에 해당하는 스페인어다. 우리는 정말 간절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손을 내밀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도 손을 내밀었다. 남자가 두 손으로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손을 놓은 남자가 일어서더니 부동자세를 취하는 군인처럼 몸을 똑바로 세웠다. 왼손을 허리춤에 대고 오른손을 왼손에 갖다 댄 남자가 절도 있는 몸짓으로 칼을 뽑는 시늉을 했다. 허공에 대고 칼을 몇 번 휘두른 남자가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근엄한 표정의 남자가 크게 외친 말은 ‘닌자’였다.

(한 친구의 애절한 고백, 한국문인협회 소설분과 콩트 선집 3,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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