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영 Mar 20. 2018

여성과 게이

동성애 혐오와 여성 혐오의 닮은 점

 지난 대선 토론 때 홍준표가 문재인에게 물었다. 동성애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자신이 페미니스트라던 문재인은 반대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을 가리키며 신의 섭리에서 벗어난 자들, 타락한 자들, 치료받아야 할 병자라고 말한다. 동성애자들의 존재는 토론과 치료, 교정의 대상이다. 동성애는 존재를 부정당한다. 동성애는 반대와 혐오의 대상이다.


문재인 당시 대선 후보가 TV토론회에서 동성애 반대 발언을 한 다음 날 이 발언에 대해 성소수자 인권 단체가 항의하고 있다.  출처 : 여성신문 


 신이나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다거나, 사회혼란을 야기한다는 등의 주장이 그들의 핵심 주장이며 본심일 것이다. 그러나 이 논리들은 추상적이고, 편향된 느낌을 줄 수 있다.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 어떠한 과학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과학이 파헤치는 대상은 항문성교다.


 항문성교는 비위생적이어서 삽입당하든, 삽입하든 위험한 병에 쉽게 노출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에이즈라는 무시무시한 질병과 “동성애와 동성애 문화”의 전염성과 결합되어 그들의 침대 위의 행위는 사생활에서 사회적 문제가 된다. 우리 사회는 게이들의 항문성교를 반대한다.


 그런데 왜 여성 간의 성행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인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에서 사람들은 여성 간의 성행위 장면을 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남성 간의 성행위를 접했을 때와 사뭇 다르다. 그것은 동성애 혐오가 아니라 흥미로운 포르노 혹은 아름다운 예술로 소비되었다. 게이 커플과 그들의 성행위는 더러운 것이 되는 반면 레즈비언 커플과 그들의 성행위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의 성행위에는 남근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념 속에서 섹스는 남성이 남근을 대상―그것이 질, 항문에 관계없이―에 삽입하는 것이다. 또한 커플이란 그러한 섹스를 수반하는 관계다. 게이들의 성교는 옳지 못한 섹스로 분류되고 레즈비언의 “성행위”는 섹스 자체에 분류되지 못한다. 섹스를 할 수 없는 레즈비언은 커플이 아니게 된다. 그렇게 동성애에서도 여성은 배제된다.

출처 : 영화 아가씨


 그렇다면 남근은 왜 그리 중요한가. 우리 사회에서 남근의 지위는 절대적이다. 남근은 그저 성기를 의미하는 것을 넘어 남성을 상징한다. 남성적 질서의 상징이 남근이다. 이와 같은 은유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총알이나 미사일을 예로 들 수 있다. 총알과 미사일은 남근과 닮아있다. 총알에는 ‘발사’ 또는 ‘삽입’하는 주체와 ‘삽입’당하는 대상이 존재한다. 이 삽입-피 삽입의 관계는 섹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남성은 여성에게 삽입한다. 이때 남성은 능동적인 반면에 여성은 대상화되고 객체화된다. 남성은 그렇게 여성에게서 우위를 점한다. 삽입은 곧 권력이다. 이 삽입의 메커니즘이 섹스를 넘어 우리 사회 전반으로 퍼져있다. 인류의 역사는 상대를 타자화, 대상화하여 정복하는 남성적 질서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남성적 질서 아래 살고 있다.


 그렇기에 남근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권력의 상징인 것이다. 여성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거세당한다. 그러나 남근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두 남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게이는 온전치 못한 남성이다. 그들의 존재가 남성적 질서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이성애자 남성들은 자신들이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처럼 게이들도 자신을 성적 대상화하리라 믿는다. 삽입당할 수도 있다는 것은 여성의 지위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삽입당하는 두려움을 넘어, 자신들이 우위를 점해 이득을 얻던 남성 중심 이성애 질서가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성 중심 이성애 질서의 붕괴는 남성적 질서의 붕괴를 초래한다. 동성애 혐오는 에이즈가 아니라 권력과 질서, 체제의 문제인 것이다.


 남성적 질서에는 대상화된 타자가 언제나 존재한다. 비백인, 피식민지 민족, 노예, 장애인, 여성, 동성애자, 성소수자 등등. 그들은 모두 소수자라는 이름으로 체제의 불합리함을 떠맡아 앉았다. 어느 시대에나 공포와 혐오의 대상은 존재해왔다. 사회가 요구하는 완벽한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기준에서 벗어난 소수자성을 가지고 있다. 주류와 소수자를 나누는 것 자체가 폭력이다. 우리는 두 가지의 성이 아니라 무한한 성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특정한 기준으로 나뉘지 않고 무한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 남성적인 질서가 붕괴된다면 더 다양한 것들이 인정될 것이고, 다양한 것들을 인정하는 것이 남성적 질서를 붕괴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2017년 07월 15일 퀴어문화축제의 한 장면  출처 : 허핑턴 포스트 코리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