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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May 25. 2021

주체, 타자 그리고 윤리

레비나스의 얼굴을 중심으로

1. 레비나스의 윤리 개요; 타자의 얼굴


    “대면은 윤리이다.”[1] 이 명제에서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윤리학이 시작한다. 대면의 순간에서 나(주체)는 타자의 얼굴을 대면한다. 대면의 순간에서 타자의 얼굴은 고통으로, 위태로움으로 나에게 명령한다. “살인하지 말지어다. 타자를 위험에 빠뜨리지 말지어다.” 이 명령은 (그것이 명령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절대적이다.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주체에 선행하는 절대자로서, 유한인 주체와 대비되는 무한으로서 대면을 통해 ‘나’를 사로잡고 ‘나’의 자연권을 유예할 것을 요구한다.[2]

    이러한 대면의 순간은 선-사회적, 선-정치적인 태초의 상황이다.[3] 때문에 대면의 순간에서 도출된 윤리는 사회와 정치의 영역에서 곤란을 맞이한다. 그것은 다수의 (절대이자 무한인) 타자들 중에 누구의 요청에 응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제3자 개념을 도입하여 해소를 시도한다. 여기서 도입은 이론에서의 등장이지 실제에서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즉, 제3자는 주체와 타자 이후에 등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타자의 눈 속에 공-현전하며 최초의 대면에서 이미 등장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4] 따라서 주체는 타자와 대면하면서 제3자들 전부를 대면한다.

    제3자의 존재는 타자의 절대의 비대칭적 윤리에서 대칭적 평등과 공평, 다시 말해 정의로의 이행을 주문한다. 우리는 이제 비교할 수 없는 절대인 타자들을 비교하고, 공정함을 요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치이다. 정치는 주체와 타자 사이의 절대적 관계를 끊임없이 수정하는 것이다.[5]

    레비나스 역시 대면의 윤리에서 사회의 정의로의 이행을 염두에 두고 제3자를 도입하여 이와 같은 확장을 시도하고, 정치의 필요성을 중요하게 다루지만 정치의 장에 독립성을 부여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그는 “국가의 익명적 보편성”[6] 때문에 국가는 타자의 고유성을 무시하고, 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한다고 판단하여, 윤리가 정치를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이는 그가 윤리학이 제1철학이라 선언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윤리와 정치 사이의 간극을 통해서, 그는 ‘정치 너머의 정치’, ‘국가 너머의 국가’, 평화를 지향한다.

2. 레비나스 윤리의 검증; 정치의 영역을 중심으로

    레비나스 윤리학이 갖는 의의는, 그가 비판하는 동일자적 근대성이 정초하는 윤리이론과 달리, 그 출발이 관계와 타자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장점이 난해성과 불명확함이라는 이름의 단점으로 보여지고, 의구심을 불러들일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가장 즉각적으로 도출되는 문제는 ‘레비나스 윤리학이 실제 정치의 영역에서 유의미한 효과를 보장할 수 있는가’이다. 이는 단순한 기능 혹은 실현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라기보다는 정치의 영역에서 그의 윤리학을 적용함에 있어 태생적인 내재적 한계는 없는지에 대한 검증의 차원이다.

    그의 윤리학을 정치의 영역에 적용하면서 기대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목적을 성취하는데 그의 윤리학은 적절하게 발휘될 수 있는가. 정치적 효과와 관련된 비판과 검증을 하기 위해선, 그 기준으로 이상의 두 질문을 명확히 해야 한다. 레비나스 윤리학의 정치적 목적은 타인의 위태로움에 대하여 사유하게 하는 것이다. 이때 사유란 개별 주체들의 사유와 함께 사회 전체가 사유하여 그 내용이 규범화되도록 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1) 제3자와 타자의 위계의 문제


    이에 대해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레비나스 그 스스로가 강조했던 윤리와 정치 사이의 간극에서 한계가 내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타자를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윤리를 포기하는 것이며 정치를 타자의 단일한 얼굴이라는 직접적인 수준으로 가져오는 것은 정치를 포기하는 것”이라 말한다.[7] 즉, 정치에 우선하는 윤리와 그 둘 사이의 간극으로 윤리가 정치 너머를 지향해야 한다는 레비나스의 주장에 대해서, 정치와 윤리 사이의 간극은 단순한 틈이 아니라 통약 불가능하다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는 정치는 대칭적 평등과 분배적 정의의 영역이기에 주체-타자의 이항관계는 선제적으로 제3자의 존재를 배제한다는 비판이다.[8] 레비나스를 비판적으로 전유하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역시 대면의 한계를 지적하며, 제3자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다. 레비나스의 주장대로 제3자가 타자와 함께 공-현전하며 주체와 대면한다 하더라도, 주체는 유한하고 타자(제3자를 포함하여)들은 무한하기 때문에 주체는 어쩔 수 없이 응할 수 없는 타자의 면이 발생한다. 데리다는 이것이 레비나스에서 삼인칭으로 나타난다고 지적한다.[9] 즉, 제3자에 대한 의혹은 타자와 제3자가 동일한 지위를 공유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10]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콜린 다비스(Colin Davis)는 제3자를 통한 정의로의 이행은 윤리적 비대칭성을 중화(혹은 완화)한다고 해석한다.[11] 이러한 중화는 태초의 절대적 대면에서의 타자의 위상을 약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레비나스 윤리의 내적 일관성에 치명적일 수 있다.


2) 내재적 폐쇄성의 혐의


    현실의 차원에서의 논의를 메타 이론적 차원으로 끌어올리자면, 레비나스 사상의 내재적 폐쇄성에 대한 의혹 제기도 가능하다.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타자는 내가 죽이고 싶어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나는 바랄 수 있다. 하지만 이 힘은 힘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이 힘의 승리는 그것이 힘으로서 패할 때 온다. 내가 죽일 수 있는 힘이 현실화되는 바로 그 순간, 타자는 나를 벗어난다. ···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고 그의 얼굴과 조우하지 않았다. 전적인 부정의 유혹··· 이것이 얼굴의 현존이다. 얼굴을 맞대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은 죽일 수 없다는 것이다.[12]

    마지막 문장에 주목해보자. “얼굴을 맞대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은 죽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맞대고 죽는 사람들의 죽음은 어떻게 설명해낼 수 있는가? 두 가지 설명의 시도가 가능할 것이다. 첫째는 살인의 이유를 “얼굴”을 맞대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과, 둘째는 얼굴을 “맞대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전자는 인격으로 재현되지 않아서 살해되는 존재들의 경우이다. 후자는 “담론에 의한 살인”이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보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책임의 완화를 논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 선-정치적, 선-사회적인 대면을 완화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서의 구조가 이러한 살인을 가능케 하지는 않는가. 우리가 자주 하는 말, “구조적 살인”이 레비나스와 만나서 이런 의미를 함의한다고 해석한다면 사회적 죽음에 대한 해석이 된다.

    이 지점에서 다시 제3자의 문제가 발생한다. 레비나스의 윤리론을 적극적으로 전유하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얼굴이 재현의 장에서 무엇이 인간다운 것으로 선택되는지 권력과 담론의 생산 이론을 접합하여 설명한다. 위에 제시한 살인에 대한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현실의 폭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대면이나 동일자적 운동에 대한 비판 외에 ‘누가 주체이고, 타자이고, 제3자인가를 선별하는 담론과 권력에 대한 분석이 요구된다. 이에 따르면 대면의 순간은 선-정치적, 선-사회적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면에서 드러나는 지위들, 주체와 타자 그리고 제3자는 권력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대면의 절대성(타자-제3자의 위계에 의해서 부정됨)과 태초성(타자와 제3자를 생산하는 권력의 효과로 부정됨)이 거세된다면 레비나스의 윤리론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또한 그가 부정하고자 했던 윤리의 전체주의로의 회귀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할 수 있다. 『위태로운 삶』에서 버틀러는 소수자 운동의 정치적 요구의 한 축은 “몸에 대한 자율성” 요구라고 지적한다. 반면 레비나스는 타자에게의 복족, 타율성을 통해서 초월을 설파한다. 버틀러는 물론 몸에 대한 자율성과 함께 타자의 부름으로 구성되는 나, 그리고 그에 대한 권리 주장도 필요하다고 강조하지만, 이 둘은 어느 정도의 상충을 가지고 있으며, 조율되지 않을 수 없다.

    버틀러에 비해서 레비나스의 경우 이러한 자율성의 영역에 대해서 함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윤리가 전체주의적 폭력에 반대하는 경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상호성과 전체성의 영역으로 회귀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까?[13] 태초의 대면에서 제3자의 등장으로 정의로의 이행 역시 상호성과 전체성의 영역으로 회귀가 아닐까?


3. 새로운 대안? 대면에서의 새로운 장면


    레비나스의 윤리론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탁월한 것은 버틀러의 레비나스에 대한 독해라고 생각한다. 레비나스의 윤리론이 선-정치적, 선-사회적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이미 구성된 주체와 타자의 이항을 가정한다는 점에서 그 구성의 과정의 이전에 존재하는 윤리적인 조건에 대해서 해명되어야 하며, 이를 버틀러가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주디스 버틀러는 대면의 순간에 존재론적 장면을 본다. 상기한 레비나스의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그것은 또한 담론의 상황이다”이다. 버틀러는 타자의 얼굴이 어떻게 담론의 상황일 수 있는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얼굴이 “말하는” 바가 “살인하지 말지어다”이므로 발화가 처음 존재하게 되는 것은 이 일차적인 계율을 통해서이며, 그래서 발화는 이 가능한 살인을 배경으로 삼아 처음 존재하게 된다. 더 일반적으로는, 발화 이전에 무언가가 우리를 향해 발화되기에, 담론은 우리에게 윤리적 요청을 한다. 단순한 의미에서, 어쩌면 레비나스가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우리가 언어를 받아들이기 이전에 어떤 타자가 우리에게 처음 발화하고 말걸기를 하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말걸기의 대상이 되는 조건하에서만 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타자가 담론의 조건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타자를 제거하면 언어도 제거된다.[14]

    즉, 타자의 얼굴은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지어다”라며 윤리적 발화를 수행하고, 이에 선행하여 타자의 얼굴 자체는 우리에게 위태로움을 발화한다. 때문에 얼굴에서 언어와 담론이 시작될 수 있으며, 타자를 제거하면 언어가, 나아가 언어가 정초해주는 주체도 제거된다. 레비나스의 대면의 윤리의 절대화 자체를 주체의 구성 자체가 타자에게 기대고 있다는 것을 포착해내는 말으로서의 면모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레비나스의 대면의 절대성 문제가 해소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절대성의 영역으로 가는 것은 타자의 얼굴 그 자체가 아니라, 대면일 것이다. 타자의 존재가 주체의 존재의 근원이라는 것에서 나아가 타자의 절대성을 관철시키는 것에는 또 다른 정당화가 필요할 것이다.


4. 나가며


    태초의 대면보다도 더 전의 호명과 주체의 구성, 그리고 그 후의 태초의 대면 사이의 간극을 채울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내가 너를 죽일 수 있다는 자명한 사실뿐 아니라, 감정과 동일시와 비동일시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갖는 속성을 생각해보자. 태초의 대면의 상황에서 주체와 타자를 유보하고, 그 상황에 언제나 매개가 되는 폭력에 집중한다면? 행위성에 대한 이론은 행위를 통해서 주체가 구성된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인식 또한 그 근본적인 양태가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가정하면)  폭력, 즉 대상을 통해서만 주체는 타자를 인식할 수 있다. 또한 인식을 통해서 오직 그를 횡단해서만 주체와 타자는 구성되고 발현될 수 있다. 이 점은 서구 근대의 동일자적 인식론을 타계하고자 했던 레비나스와 맞닿을 것이다. 이러한 변경으로부터 다시 레비나스의 윤리론을 재구성해, 레비나스에 대한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의혹도 해소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15]

    대상과 방향으로서의 타자. 타자는 곧 방향을 의미한다. (폭력) 행위라는 매개가 어떤 방향으로 흐르는지가 주체와 타자를 구성해낸다. 그것은 오로지 권력의 차이에 의한 일방으로의 흐름이기보다는, 예측 불가능성을 가진 미지의 영역이다. 물론 현실 폭력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그것이 어떤 경향성을 지닌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경향 속에서, 태초에는 그 시작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을 상기하여 전복의 틈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상기한 것들에 대해서는 보다 깊은 공부를 통해서 다듬어야 할 사유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윤리에서 타자의 자리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타자의 자리는 타자에 대한 대우라는 주체 중심적 태제라기보다는 나와 너 그리고 윤리를 구성하는 부정할 수 없는 조건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윤리론이 많은 지적을 받지만, 또한 윤리의 영역에서 타자의 부정할 수 없는 자리가 있음을 제기하였기 때문에 그 힘을 갖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후주


[1] 김영걸, 2020, 「레비나스와 정의 그리고 정치」, 『범한철학 제97집』, 범한철학회, 116쪽 재인용; Gérard Bensussan, Éthique et expérience : Levinas politique, 64p.


[2] “얼굴에 대한 접근은 가장 기본적인 양태의 책임감이다···. 얼굴은 내 앞에(en face de moi) 있지 않고, 내 위에 있다. 그것은 죽음을 앞둔 타자로, 죽음을 꿰뚫어 보며 죽음을 드러낸다. 둘째로 얼굴은 혼자 죽지 않게 해달라고 나에게 요청하는 타자이다. 마치 그를 혼자 죽게 하면 그의 죽음에 공범이 되기라도 하듯이. 그래서 얼굴은 나에게 말한다. 살인하지 말지어다. 얼굴과의 관계에서 나는 타자의 자리를 찬탈한 자임이 폭로된다. 스피노자가 존재를 유지하려는 노력(conatus essendi)이라고 부르며 모든 식별 가능성의 기본원칙으로 정의했던 그 유명한 “존재할 권리”가 얼굴과의 관계로 인해 도전받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에게 응답할 나의 의무는 자기 생존, 생존권에 대한 나의 자연권을 유예한다.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나의 윤리적 관계는 자아가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고 그 자신의 세계-내-존재 안에서는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얼굴의 취약성에 나를 노출하는 것은 삶에 대한 나의 존재론적 권리를 의문에 부치는 것이다. 윤리에서 타자의 존재권은 나의 존재권에 우선한고 이 우선성은 이 윤리적 명령으로 요약된다. 살인하지 말지어다. 타자의 삶을 위험에 빠뜨리지 말지어다. ” Judith Butler, 2018, 『위태로운 삶』, 윤조원 역, 필로소픽, 재인용(이후 “Judith Butler,  2018”); Mass Market Paperback2006, Entretiens avec Emmanuel Levinas 1992-1994.


[3] 김영걸, 위의 논문, 118쪽.


[4] “얼굴의 현현은 나를 보는 눈 안에서 제삼자의 온 인류의 현전을 증언한다.” 김영걸, 위의 논문, 115쪽, 재인용; Emmanuel Levinas, totalité et infini essai sur l'extériorité(Le Livre de Poche, 2009), 235p.


[5] “제삼자가 필요하다. 여하튼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나는 항상 제삼자와의 관계 안에 있다. 그러나 그 또한 나의 이웃이다. 이 계기로부터 가까움은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 비교하고, 검토하고, 생각해야만 한다. 이론의 근원으로 쓰이는 정의를 행해야만 한다. ··· ‘정의’라는 단어는 실제로 타인에 대한 나의 ‘종속’이 아닌 공정을 필요로 하는 자리에 훨씬 더 많이 있다. 만일 ‘공정(l'équité)’이 필요하다면 비교와 평등이 필요하다 : 비교되지 않는 것 사이의 평등. 따라서 ‘정의’라는 단어는 타인과의 관계보다 제삼자와의 관계에 훨씬 더 들어맞는다.” 김영걸, 위의 논문, 119쪽 재인용; Emmanuel Levinas, 1982, De Dieu qui vient a l’idee, 132~133p.


[6] 김영걸, 위의 논문, 126쪽 재인용; Emmanuel Levinas, 2009, Totalité et infini essai sur l'extériorité(Le Livre de Poche), 342p.


[7] 박예은, 2016, 「레비나스의 타자윤리와 제3자의 정치철학」, 『중앙대학교 인문논총 제73권 제1호』, 309쪽 재인용; Slavoj Zizek, 2006, 신체 없는 기관, 김지훈 외 역, 208쪽.


[8] 박예은, 위의 논문, 325쪽 참조.


[9] Jacques Derrida, En ce moment même dans cot ouvrage me voici


[10] 문성원, 2015, 「정치와 윤리 - 데리다의 레비나스론」, 『시대와 철학 제26권 3호』, 22쪽.

[11] 예은, 위의 논문, 324쪽 재인용; Colin Davis, 2014, 『처음 읽는 레비나스』, 주완식 역, 129p.


[12] Judith Butler, Ibid, 2018.


[13] 박예은은 레비나스를 옹호하기 위하여 그에 대해 가능한 반박을 재반박하는 과정에서 이 문제를 거론한다. 그는 “제3자를 통해 확보된 보편성이 제기하는 문제에서 타자의 형이상학적 우위는 포기되지 않으며 나오 타자와의 관계는 언제나 모든 관계의 근원”한다고, 또한, “타자와의 관계에서 나의 자리, 나의 자유가 의문시되는 것과 마탄가지로 제3자를 통해서는 정의의 영역에서 나의 자리, 나와 타자와의 관계가 의문시된다.”고 제3자의 관계와 타자의 관계를 유비한다. 그러나 타자의 형이상학적 우위가 완화되지 않는다면, 이는 결국 타자와 제3자 사이의 위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이고, 이에 따라 조정되는 정의는 오로지 가까움의, 즉, 동일자적 윤리와 다를 바가 없어진다. 유비의 문제 역시 제3자와의 관계에 대면의 관계의 정식화가 적용된다 하더라도 이미 다른 차원의 문제를 단순하게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대면은 오롯한 책임이 가능하다. 그러나 제3자의 관계가 있는 사회의 영역에서 오롯한 책임의 이행은 다른 타자에 대한 불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자세한 내용은 박예은, 위의 논문, 323~325쪽 참고할 것.


[14] Judith Butler, Ibid, 2018. 


[15] 일각에서는 레비나스가 그토록 타계하고자 했던 동일자적 존재론을 레비나스 역시 반복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김상록, 2011, 「존재의 향유와 존재기능 - 레비나스의 하이데거 비판에 관한 소고」를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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