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비주류 운동이 그렇듯 아나키즘 또한 그 이름을 적들의 조롱에서 따왔다. 아나키(anarch)는 무정부 상태, 혼란을 뜻한다.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라는 말은 권력자들이 말 안 듣고 시끄러운 놈들을 보고 “정부를 없애고 사회가 혼란해지길 바라는 놈들”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던 말이다. 이를 그 말 안 듣는 놈들이 “그래, 우리 그런 놈들이다. 그래서 뭐?”하며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라는 말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정말 아나키즘은 이름처럼 사회의 혼란을 바라는 사상일까?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변명을 해보고자 한다.
아나키즘은 반권위주의다.
아나키즘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무정부주의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나키즘이라는 표현보다도 반권위주의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본래 아나키즘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도 권위와 권력에 대한 부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권위의 부정이 아니다. 아나키즘의 주적은 중앙집권화된 거대 권력이다. 그것이 정치권력이든 자본권력이든 문화 권력이든 간에, 권력은 끊임없는 타자화를 통해 공격할 대상을 만든다. 그 공격할 대상이 “극성스럽고 폭력적인” 노조나 노동자일 수도 있고, “나약하고 영악한” 여성이나 “더럽고 이상한” 성소수자일 수도 있고, “미천하고 열등한” 타인종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이 권력은 공격할 만한 대상들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그리고 자신을 일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 대상을 향해 공격할 것을 주문하여 그들이 체제에 느끼는 불안과 불만, 분노를 소수자에게 돌린다. 아나키즘은 이와 같은 폭력에 반대하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이 더욱더 많이 반영될 수 있는 작은 공동체를 지향한다. 거대하고 중앙집권화된 권력은 억압을 불러오고 그 권력체제 아래의 개개인은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대의제? 글쎄….
그런 의미에서 아나키즘은 우리가 정당하다고 받아들이는 대의제에 의문을 던진다. 거대화된 현대국가 안에는 다양한 개인들과 그들의 의견이 있는데 권력은 그 전체가 선출한 소수의 사람들에게 쥐어준다. 그렇다고 선거가 그리 공정한 것도 아니다. 다양한 요인으로 특정 민심이 과대, 과소 대표된다는 점은 언제나 대의제의 문제였다. 선거가 완벽해서 100% 민의를 반영했다손 치더라도 근본적인 한계가 남는다. 바로 다수결이라는 점이다. 문제에 대한 의견은 매우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대의제의 투표는 어쩔 수 없이 찬과 반이라는 두 의견만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은 삭제된다. 또한 다수결 아래서는 다수가 소수를 향해 폭력을 가할 때 이를 막을 근거가 없다. 정당한 투표를 거쳐 결정된 사항이라는 정당성을 근거로 해 소수를 향해 폭력을 휘두를 때, 다수에 포함되지 못한 이들은 민주주의와 정의의 이름으로 고통을 받는다. 대의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라는 것은 인민 스스로의 통치, 각 개인 스스로가 스스로를 통치하는 것이다. 현재의 대의제는 또 다른 유형의 과두정일 뿐이다. “그럼 이렇게 거대해진 국가를 운영하는데 직접 민주정치를 하자는 헛소리야?”라고 물을 수도 있다. 대답은 예스다! 국가의 규모를 줄이면 된다. 애초에 국가 자체가 이렇게 클 필요가 없다. 국가의 근본을 세우고 국민들의 결속력을 다지는, “국가”를 “국가”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정체성들은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의 결속력은 국민이 믿거나 그 나라가 국민들에게 강제하기 때문에 유효한 것이다.
아나키즘은 초국가적이다. 국가나 민족보다도 개개인이 인격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하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휴머니즘적인 것이다. 아나키즘은 최고 형태의 민주주의다.
자본주의
통신과 교통의 발달과 자본의 끊임없는 확정성으로 인해 세계는 세계화되었다. 이전과 다른 세계화 시대를 보여주는 예는 기업과 국가의 싸움이다. 최근 한국 GM이 군산공장을 철폐한다고 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우리 정부와 GM 측은 서로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한다. 기업은 이제 국가에 소송을 걸기도 한다. 이와 같은 점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자본권력이 정치권력과 대등하게 싸울 정도로 몸집이 커졌다는 뜻이다.
아나키즘이 활발했던 시기는 세계대전 시기 전체주의의 발흥과 같은 시기다. 그래서 정치권력과의 대립이 아나키즘의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정치 단위보다도 훨씬 몸집이 큰 시장과 자본권력이 등장하면서 아나키즘은 자본권력과도 각을 세우게 된다.
자본은 특히 윤리와 무관하게 움직인다. 정치권력은 일반 대중을 상대로 표를 얻어야 하기에 일반 대중들의 윤리적, 도덕적 잣대를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자본은 그 목표가 이윤추구인 만큼 윤리적으로 자유롭다. 자본은 최대의 합리성을 절대법칙으로 하여 자본의 이익이 되지 않는 것들을 배척하거나 혹은 이윤으로 치환하여 자본의 체제 안으로 흡수시킨다. 죽음을 예로 들 수 있다. 과거의 무덤은 생활공간의 매우 가까이 있었다. 그러나 죽음은 합리성이나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제는 납골당이나 매장 등 일상으로부터 분리시켰다. 정신병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에 흡수된 것으로는 감정을 들 수 있다. 사람들이 갖는 부정적 감정을 그대로 두면 체제가 불안해져 이것을 적절히 해소하여 반항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자본은 그것을 산업화하였다. 불과 몇 년 전에 한국을 휩쓸고 간 힐링 열풍이 그것이다. 또 다른 예로는 인터넷 혐오 문화가 있다. 개인 방송 같은 각종 인터넷 콘텐츠는 약자에 대한 조롱을 통해 돈을 번다. 그들은 자극적이면 자극적인 발언을 할수록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고 그것이 곧 돈이 된다. 콘텐츠 소비자들은 자신의 분노를 자극적인 대상을 향해 퍼붓기 위해 끊임없이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된다.
이렇게 자본은 돈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흡수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배척하며 인간을 단순히 경제적 인간으로만 머물게 한다. 아나키즘은 경제적 인간이기만 인간이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으로서의 인간을 꿈꾸는 것이다.
통치수단이 된 문화
문화는 과거부터 통치 수단으로써 작용했다. 이른바 빵과 서커스, 3S 등이 그렇다. 문화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주요한 사회 도구이다. 문화 속에서 어떤 대상에 대해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다양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대상의 가능성을 한정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한계치 아래로만 받아들인다. 이것이 바로 문화가 통치수단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주류나 권력에 이롭다고 여겨지는 대상들은 다양하고 긍정적으로 표현되는 반면 소수자나 권력에 반하는 것들은 한정되고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문화 속 여성의 캐릭터를 예로 들면, 남성의 조력자 혹은 남성의 서사에 방해가 되는 방해물 정도로 묘사된다. 요즘은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이와 같은 것을 탈피하고자 노력하지만, 단순히 여성 주인공을 남성들보다 더욱 거친, 남성보다 남성다운 여성으로 내세우는 것은 한계가 있다. 물론 그와 같은 역설, 차별받는 사회적 지위로서의 여성이 본인의 노력으로 그 차별을 상쇄해 나가는 것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 캐릭터가 상징하는 바는 여성에게 “자궁 달린 남성”을 강요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남성적 질서의 반복인 것이다.
게임도 권력의 논리를 내면화하기를 요구한다. 게임에는 무수한 규칙들이 있다. 게임에서 이기거나 좋은 점수를 내기 위해서는 게임의 규칙을 몸으로 체화해야 한다. 만약 그 규칙들을 모두 생각하면서 플레이를 한다면 그 게이머는 게임에서 진다. 게임을 진행하는 와중에는 게임 규칙을 바탕으로 게임에서의 승리 혹은 고득점에 대한 생각만을 한다. 스타크래프트를 예로 들면 누가 죽어가는 유닛 하나의 목숨을 생각할까? 누가 일꾼들의 복지를 생각할까? 누가 전쟁에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까? 스타크래프트는 오로지 전쟁만을 위해서 돌아간다. 플레이어는 자신이 유닛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처지를 망각한 채 사령관의 방식으로 플레이를 하게 된다. 내가 자주 하는 문명이라는 게임도 그렇다. 문명은 본인의 문명이 다른 문명과 경쟁하여 과학, 문화, 외교, 정복 승리를 달성하는 게임이다. 이 게임은 크게 내치와 외치로 나눌 수 있다. 내치에서 신경 써야 할 것들 중 하나는 바로 시민들의 행복도이다. 시민의 행복도가 마이너스 값이 되면 생산, 과학 발전 등에서 큰 제약이 된다. 시민의 행복도는 단순히 생산력을 유지하기 위한 대상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외치에서는 크게 외교와 전쟁이 있다. 외교는 도시국가와 동맹을 맺는 것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이 도시국가는 주요 문명에 비해 독립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이들은 도시 하나만을 가진다. 이들과 동맹을 맺게 되면 이들로부터 각종 이득을 취할 수 있고, 세계대회라는 투표장에서 동맹 수만큼의 표를 행사할 수 있다. 또한 도시국가에 스파이를 배치하면 선거조작을 통해 본인 문명에 우호적이게 만들 수 있다. 역시 권력의 메커니즘으로 도시국가를 대상화하는 것이다.
문화는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자연스럽지 않은 생각을 주입한다. 이와 같은 문화 권력은 주로 정치권력이나 자본권력이 통치수단으로써 사용하면서 나타난다. 문화에서의 차별과 불평등 또한 아나키즘이 맞서는 적이다.
아나키즘은
아나키즘은 휴머니즘이다. 평화주의다. 개인주의이며 공동체주의고, 이상주의이며 현실주의다. 냉철한 이성을 통한 분석과 뜨거운 감성을 통한 행동의 사상이다. 이상이 내가 생각하는 아나키즘에 대한 변명이다. 이 글이 아나키즘을 보다 더 우호적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나는 이 글의 목적을 다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