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많은 곳에서 우리를 내보인다. 커리어를 위한 자기소개서에서도, 회사에서 쓰는 연초 업무계획서에서도, 학교 지원을 위한 지원서에서도, 링크드인이나 여타의 자기 PR 수단에서도, 심지어 일상에서 시시각각 나누는 대화 속에서도 추구하는 이미지와 이상이 있다. 대개 일하는 나는 사람인 나보다 조금 더 크다. 생산성의 측면에서, 조금 더 포장되어 있다. 되고 싶은 나. 노력해서 이렇게 될 거예요, 하는 나.
선언의 힘을 믿는다. 언령이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게 기도의, 축복의, 발원의, 그 모든 복을 비는 행위들의 핵심이 아니던가. 열심히 포장해서 내보이다가, 언젠가의 자기소개서를 꺼내보고 그 길을 따라 걷고 있는 나를 보면 소름이 돋을 때가 있다. 결국 그게 언령으로 내 안에 남았구나, 그렇게 고뇌하면서 갈팡질팡하면서도 결론을 내렸던 게 먼 옛날의 내 생각 속 결론과 같다니. 내 뇌 속에 있는 틀은 이거구나, 하고서. 그래서 나는 내가 스스로에게 무엇을 다짐하고, 나를 둘러싼 사회에 어떤 모습의 나를 파는지는 알고 팔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일관성이 있으니까. 사실은 일관성도 상품성의 일부다. 그렇다면 적어도 파는 대로 꺼내 팔다가 흘러 흘러 종착하는 곳에서 염증 내면서 사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얼 파는지도 모르고 팔다 보면 나도 나를 모르게 정처 없이 목적지에 이르게 되거나 남이 나를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밀어 그에 밀려서 가게 되기 때문에. (다만 포장된 나에 맞추려고 노력하다가는 자칫 고꾸라지기 십상이므로, 속력보다는 방향성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개인적으로 일은 인간의 본능과 다소간에 맞지 않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전공이나 출신 학교, 학력, 수상 경력이나 교육 경험, 성격과 조직 생활에서의 적응 방식, 심지어 정치 성향을 포함한 사회에 대한 태도, 사는 곳까지도 여러 가지 내가 팔 수 있는 것을 내 안에서 꺼내서 팔고 스토리 라인을 만들게 된다. 거기에 속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선언하되, 선언이 나보다 앞에 있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다. 내가 그걸 통해서 어떤 이미지를 표상하고 있고, 무얼 팔고 있는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팔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걸 통해서 나는 어떠한 이미지로 비추어지는가. 그 이미지를 보고 나를 선택한 이들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할 것인지가 그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적어도 시장경제 하에서 노동시장의 상품으로써 선택받아야 하는 개인으로서는. 솔직히 말해, 수많은 수험과 교육과 선발의 절차 모두 보다 나은 노동시장 진입을 위한 선별 절차가 아니었는가. 그걸 놓치기 싫어 이어가자니 그러려면 자꾸자꾸 나를 돌아보고 객관화해보고 나에게서 나를 유리해 보게 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누군가는 자아의 평면과 시장의 평면의 전환이 자유로운 걸까. 원체 딱히 계획적이지도 않은데, 생각만 많아서, 자꾸자꾸 노력해야만 그렇게 될 수가 있다. 계획적이고 효율적인 사람으로만 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겠지. 내가 시장의 평면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닌데도.
자본주의의 승리와 함께 태어나, 신자유주의와 함께 자라난,캐피털-네이티브의 세대는 스스로를 입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조차도 연습이 필요하다. [1]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