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이 본래성을 회복하는 방식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가 아닌가”
-장 폴 사르트르 <구토>
생성 소멸하는 세계 안에서 존재자가 가진 생의 시간은 유한하다. 살아있는 존재는 언젠가 죽음에 이르기 마련이므로 역설적이게도 죽음은 '생명력을 지닌 것들' 기저에 태초부터 깊이 각인되어 있다. 존재는 이 죽음이라는 방점 앞에 놓인 채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 탐문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존재하는 이유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사실 인간의 존재 목적은 명백한 쓰임이 있는 도구보다도 모호하다. 우리는 그저 각기 다른 세계에 투입된 자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계의 어딘가에 본질적인 이유 없이 던져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갑자기 내면에 침재 되어있던 무용(無用)에 대한 고질적인 불안과 함께 지독한 허무가 밀려온다. '실존한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어떠한 구속력도 없다. 역으로 말해 우리는 실존의 임무를 스스로 부과할 가능성을 지녔다. 사르트르는 이것이 인간이 도구와 다르게 자유에서, 해방에서 시작하는 이유라고 보았다. 죽음에 대한 선구적 결의를 바탕으로 존재 가치를 찾으려 드는 것. 한정된 생의 시간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이러한 존재론적인 태도는 이창동 영화가 보여주는 세계 그리고 그가 그리고자 하는 이미지들과도 꽤나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을 영화라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의 2000년대 이후 작품인 <시>(2010)나 <밀양>(2007)과는 다소 차이가 나타난다. 리얼리즘의 거장으로 불리는 이창동의 미장센에서 시공간은 항상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자연스럽게’ 조율된 상태로 기능해왔다. 그러나 <버닝>에서 로케이션은 각 인물들의 상징성과 대놓고 직접적으로 결부되어있다. 표면적으로 버닝 속 인물의 거주지는 그들의 계급적 위치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유한 벤은 부의 표상으로 자리 잡은 강남 반포에 위치한 고급 빌라에 기거한다. 종수는 대남방송과 동남아 이주민 여성이 공존하는, 고향이지만 타향처럼 느껴지는 파주 집에서 지낸다. 빚이 있는 해미는 하루에 한 번 남산타워에 비친 햇빛으로 북향의 아쉬움을 달래는 다세대 주택의 원룸에서 살아간다. 때때로 과도한 의미 부여는 핍진성(실제처럼 보이는 기능)을 떨어뜨리는 경우가 있는데, 만약 <버닝> 속 시공간이 작위적으로 느껴진다면 아마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또한 <버닝>의 사건은 묘연하게 중첩된 상태로 기존의 리얼리티 서사가 지닌 시간의 순방향적인 속성을 거부한다. 종수는 현실을 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과거를 기억하거나 비현실을 끌어들인다. 사건은 명료한 시작과 끝 사이에 위치하기보다 계속해서 추론 가능성을 던지는 듯한 서사의 방향에 기대어 흘러간다. 이러한 모호함은 이창동이 <시>나 <밀양>에서 나름의 확고한 인과율에 의해 이야기를 이끌어나갔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렇다면 <버닝>은 <시>와 <밀양>과는 전혀 ‘다른’ 영화인 것일까. 결이 다른 영화라고 할 수는 있겠으나 세 작품을 관통하는 ‘생의 이미지’라는 키워드는 그들 사이의 교묘한 동질성을 형성한다.
시각을 조금 거시적으로 확장해보자. <버닝>, <시>그리고 <밀양>의 주인공은 모두 '죽음'이라는 거대한 화두 앞에 놓인다. <버닝>에서 해미의 실종과 당면한 종수는 벤을 또 다른 죽음으로 몰아넣고자 하는 욕망의 기로에 서있고, <시>에서 미자는 손자가 가담한 성폭력 사건으로 투신자살한 피해자 소녀의 죽음을 유가족과 합의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밀양>의 신애는 유괴 후 살해당한 아들의 죽음을 용서하라는 구원의 식 앞에 위치한다. 각각의 인물은 모두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본인 삶의 시간을 반추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이창동은 이를 설명조의 서사로 풀이하기보다 이미지로 은유하고 있다.
<시>의 엔딩에서 미자(윤정희)의 자작시 내레이션은 투신한 소녀가 떠내려 온 프롤로그의 아침 강물 위로 재배치된다. 고요하게 일렁이는 물결 위로 흘러갔던 죽음의 이미지는 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미자의 목소리와 공명하며 아침이 지닌 생명력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밀양>에서 신애(전도연)가 위치한 자리는 종종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 신애가 새 보금자리에서 아들을 잃고 그를 죽인 살인범을 용서한다고 말하기까지, 그녀의 도처에는 타 들어가 버릴 듯한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이 존재한다. <밀양>에서 좌절하며 아스팔트 위로 주저앉은 신애 위로 내리쬐는 볕은 모순적이게도 피어나는 것보다 지고 있는 것을 부각한다. 인물의 실루엣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오후의 그림자는 인생의 중반부에 접어든 존재의 고뇌를 극적으로 묘사하는 효과를 낳는다. 그렇다면 <버닝>은 어떠한가.
<버닝>에서 종수의 의식은 푸르스름한 시간대에 존재한다. 종수는 비닐하우스를 찾기 위해 안개가 휩싸인 초저녁 또는 새벽의 파주를 돌아다닌다. <버닝>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이 푸른 색채는 완벽한 낮도 밤도 아닌(흔히들 이를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부른다) 경계의 영역이다. 이 설익은 풍경은 무모함과 불안이 담긴 청춘의 시간과 궤를 같이 함과 동시에 해미의 실종에 대한 자신만의 확실성을 옹립하는 순간으로 자리한다. 우리는 이 순간의 이미지들과 마주하며, 실은 이 모호한 서사야말로 미스터리 장르가 이미지만으로도 존립할 수 있음을 대변하는 의식적 장치인 것은 아니었을지 고심하게 된다. 결국 유한한 생을 인식하는 과정으로서의 죽음은 이창동만의 작가주의의 메커니즘의 틀 안에서 철저히 계산된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해당 글은 시리즈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