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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꾼 Sep 02. 2020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떠맡는다 (2)

버닝이 본래성을 회복하는 방식 

혐오의 욕망이 발화(發火)한 세계에 던져지다      


  아, 이 얼마나 복잡한 세상인가. <버닝>의 디제시스는 그 어떠한 현실 세계만큼이나 다층적이다. 여기서 다층적이라는 말은 한 세계의 근본 구조가 다채롭다는 뜻이 아니라 세계 속에 위치한 각 인물이 인지하는 세계가 각기 다르다는 것에 가깝다. 종수 해미 그리고 벤의 세계는 저마다의 처지에서 비롯한 다양한 삶의 양식을 근간으로 한다. 그들 각자의 인생은 서로 다른 양상으로 선을 그리면서 이야기의 통일적 구조를 어지럽힌다. 관객은 해미를 좇다가 다시 벤을 좇고 끝내는 자신이 영화가 아닌 그저 종수의 시점 그 자체를 좇고 있었음을 인지하게 되는 현혹의 과정을 겪는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까지도 우리의 주관적 인식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세계는 처음부터 인물의 주관에 의해 정의될 뿐 진실은 (그것이 객관성을 담보하는 어휘라 가정하였을 때) 애초에 존재하지조차 않았다. 해미가 이야기하는 진실, 종수가 좇고자 하는 진실 그리고 벤이 숨기고자 하는 진실은 사실 각자의 시선에 얽힌 허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버닝>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이 통상적으로 인지되는 결백과 같은 형태가 아니라 도리어 욕망의 모습에 가까운 점에 주목해야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버닝>의 세계에서 이 욕망이 무언가를 혐오하고자 하는 쪽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영화 <버닝> 속 벤 (스티븐연) 

   벤은 물질적으로 풍요롭다. 그는 어머니와 다정하게 통화를 하고, 가족 모임에도 주기적으로 참여하며, 동네 경비원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겉으로만 보면 나름의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가 대화 도중 자연스럽게 하품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일 때, 그리고 그의 언어 어딘가에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모습이 배어있을 때, 우리는 갑자기 몹시 불편해진다. 벤이 요리하는 이유는 자신이 만든 것을 재물화하여 삼키는 과정이 즐겁기 때문이다. 그가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건 무언가의 쓸모없음을 확인할 수 있음이 흥미로워서이다. 그는 제3세계의 국가에서 만난 낯선 인물과의 가변적인 관계를, 마치 관례처럼 전시하며 여유를 과시한다. 벤이 종수의 의구심 앞에서 초탈한 얼굴로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어느 정도 예견 가능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반증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노력을 통해서도 구해지지 않을 것들이 벤에게는 이미 쥐어져 있다. 그렇기에 그의 삶에 대한 원동력은 외부로부터 발생하는 흥미라는 자극에서 기인한다. 사실 벤에게 '재미'는 매우 중요한 존재 이유다. 그가 화단의 돌을 가져와 '자신은 재미만 있으면 모든지 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에는 우스갯소리 이면의 진심이 읽힌다. 눈물을 글썽이는 해미 앞에서 자신은 운 기억이 없어 슬픔의 증거를 찾을 수 없다던 말은 자조적 고백보다 흥미로움에 대한 성토에 가깝다. 타자의 시선에서 인간으로 정의된 것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재미를 느끼는 벤을 보며, 우리는 어느 순간 그가 실존을 부인하고 본질에만 주목하려 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종수를 '작가'로 소개하며 종수에게 끊임없이 어떤 글을 쓸 것인지, 글은 계속 쓰고 있는지 묻는다. 마치 글을 쓰는 것이 종수의 본질인 양 대하는 그의 태도에는 존재의 실존을 인정하지 못하는 혐오가 느껴진다. 

영화 <버닝> 속 해미 (전종서)

  한편 해미는 리틀헝거의 입장에 놓여있지만 그레이트헝거로의 도약을 꿈꾸는 존재다. 카드빚에 쫓기는 형국이지만 홀로 아프리카 배낭여행을 떠난다. 세속에 얽힌 리틀헝거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의 기준에 한참 엇나가 있다. 그녀의 인지 회로는 팬터마임을 통해 없는 것을 잊기 위한 반복적 세뇌의 과정을 겪는다. 하지만 그녀는 종수가 '상상 속의 고양이한테 밥을 줘야 되는 거냐'라고 물을 때 '없는 것을 있다고 하겠냐 ‘며 모순적인 반응을 보인다. 사실 그녀의 인생에는 모순점이 많다. 해미는 삶의 의미를 구하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자신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소망하게 된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이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을 속박하는 외의를 탈피한 채 자유로운 비상을 연상케 하는 춤을 추지만 결국에는 현실과 불가분 한 삶을 깨닫고 눈물을 흘린다. 해미는 무(無)를 잊고자 한다. 그러나 잊어버림은 역설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상기시킨다. 모순의 굴레 속에서도 자신을 솔직하게 표출하려는 그녀의 노력은 리틀헝거들로부터 '말을 잘 지어내는', '돈이 한 푼도 없는', '외로운', '창녀' 등의 염세주의적인 용어로 단정 지어질 뿐이다. 종수가 해미를 찾기 위해 그녀의 일터로 찾아갔을 때, 해미와 같은 분홍 시계를 차고 있던 한 동료는 '그런 말 아세요? 여성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고 이야기한다. 해미의 갑작스러운 소멸은 결국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사유되는 바처럼 그녀가 어떠한 세계 안에 던져졌었고(피투성), 그 세계를 스스로 떠맡지 못했음(존재자가 현존재로서 현사실성을 쟁취하기 어려웠음)을 암시한다. 해미의 혐오는 존재가 의지와 주체성을 갖추었음에도 제대로 존립하기 어려운 이 세계 그 자체를 겨누고 있다. 그녀의 혐오는 그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이 세계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영화 <버닝> 속 종수 

   반면 종수의 혐오는 영화의 초반부 상대적으로 명백하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 종수에게 있어 혐오와 결핍은 그림자 같은 것이다. 아버지의 분노조절장애로 집을 나가버린 엄마, 종수는 그런 아버지를 ‘미워한다’고 표현한다. 종수가 처음 태운 것은 비닐하우스도, 벤과 그의 차도 아닌 어머니의 옷이다. 종수에게 '태운다'는 것은 그가 벤을 만나기 전까지 그저 자신의 결핍을 인식하는 행위에 불과했다. 종수에게 벤은 어떻게 부를 획득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과시의 형태로 드러나는, 어딘가 내적인 허무가 있어 보이는 부류다. 그런 벤을 종수는 '개츠비'라고 표현하지만, 사실 벤은 개츠비처럼(그는 늘 주변인들에게 데이지에 대한 결핍을 이야기하곤 했다) 자신의 결핍을 누군가에게 직간접적으로 표현한 적이 없다. 그러나 결핍과 함께 자란 자에게 결핍이 없는 세계는 가시적으로 그려지지 않기에 종수는 결코 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해미가 사라지기 이전까지) 벤이 해미와 같은 무산계급을 만나는 이유가 알쏭달쏭하고 해미의 자유로운 춤사위가 창녀의 몸짓과 다름없어 보이는, 일차원적 인간의 사고 회로에 갇혀있는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우리는 이런 종수의 면모를 통해 가진 것 없는 리틀헝거의 사고방식이 때때로 그 자체만으로도 혐오의 증거가 될 수 있음을 목격한다. 그리고 엔딩에서 그가 벤을 향해 아버지가 갖고 있던 칼을 꽂아 넣을 때, 관객은 그것이 상상이든 실재이든 혐오가 실천적 형태로 나타나는 잔인한 시대의 일부를 간접 체험하게 된다. 


*해당 글은 시리즈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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