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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온맘 은지 Oct 20. 2024

내가 좋아하는 '시간'

빛나는 가을 이파리들 사이로

“은지 씨, 나가서 바람 쐬고 들어와요.”


평일 내내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거의 독박육아를 하고 있는 날들이 이어지자 남편이 주말만큼은 나가서 바람을 쐬고 오라고 시간을 내어 준다.

잠시 집 근처 공원에 나가서 산책을 하고 좋아하는 찻집에 들어가 차를 마시는 시간.

나는 이 시간을 참 좋아한다.

가을비에 먼지를 씻어 내린 초록빛 나뭇잎처럼 일상의 피로에서 나를 씻기는 시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갇혀있지 않고 마음껏 흔들릴 수 있는 시간. 나를 놓아주는 시간이다.


파아란 솜사탕 같은 하늘 아래 푸르른 잔디밭 놀이터에서 살랑거리는 나무들을 바라보는 시간이 있기에 나는 오늘을, 돌아오는 한 주를 또 살아낼 수 있다.

이 시간 속에는 나는 그동안 아기를 보며 쌓였던 피로를 씻고, 미래를 향해 달리는 복잡한 계획을 중단한다. 하루 종일 달리는 인생의 기관사인 나를 잠시 놓아주는 것이다.


차를 마시며 햇살에 빛나는 나무들을 바라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잠시 생각을 비우고 나무들과 함께 살랑거려 본다. 그러다 보면 슬픔과 환희, 기쁨, 불안, 행복, 불쾌, 걱정, 간절함들이 각자의 자리로 사르르 흩어져 날아간다. 그리고 남는 건 차분함. 이 시간만큼은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하는 자연처럼 나도 차분하게 오늘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마음이 차분해지니 투명하게 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남편도 아니고, 아기도 아닌 나.

나 ‘김은지’라는 존재가 나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동안은 저 멀리서만 바라봤는데 나라는 존재를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어서, 쓰다듬을 수 있어서 설레어 온다.  

내 마음자리를 맑게 바라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 본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차와 함께 음미하다 보면 꿈꾸는 미래의 내 모습이 환하게 그려지는 듯하다.

육아에 치이다 보면 내가 꿈꾸는 자리는 흐리게만 보였는데..

잠시 나를 놓아주는 시간 속에서 나를 진하게 보게 되는 이 역설적인 상황이 미묘하게 야릇하다.

 

한 장소에서 같은 차를 마시며 마주하는 마음은 단 한 번도 같은 적이 없었다.

매번 조금씩 다른 빛깔로 내 가슴 저 중앙에서 빛을 내며 발한다.  


‘오늘 하루는 어땠지? 에서부터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고, 어떻게 살고 싶은가..’


잔잔히 나를 바라보다 보면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믿음과 용기이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을 느낀다.

  

평온함과 불안, 설렘과 두려움, 꿈과 현실, 게으름과 절실함이 서로 팽팽히 줄다리기를 할 때가 있지만, 여러 현실과 감정을 오가며 여행하듯 도전하며 느끼는 사람. 최선을 다해 원하는 것을 다 살아보는 사람.


결혼하기 전, 20대 후반기에 젊음의 용기와 패기를 갖고 혼자 막연히 중국으로 배낭여행을 간 적이 있다. 중국어를 할 줄도 모르면서 지도 하나 갖고 숙박예약도 하지 않은 채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다녔었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듯 구석구석 걸어 다니고

다리가 아프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보고 느꼈던 시간들.

이 여행 속에서 나는 자식에게 들려줄 수 있는 엄마의 에피소드를 만들었고, 미지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자신감과 용기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더 먹을수록 용기는 빛을 바래고 두려움이 진해져 오기도 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잘 살 수 있을까. 이렇게 가는 게 맞을까...’


문득문득 두려워질 때가 있지만 다가오는 삶이 두렵지 않다는 것을 여행을 통해, 그동안 걸어온 삶을 통해 깨닫게도 되었다. 그래서 두려움이 슬쩍 밀려올 때면 혼자 배낭여행했던 그때를, 기대감을 안고 일자리를 도전했던 그때의 나를 떠올려 본다.

그때의 힘으로 지금의 나를 일으켜 세우며 나를 다시 한번 믿어보기로 한다.

이렇게 나의 삶을 다시 한 번 더 믿는 이유는 울고 웃으며 넘어지고 일어서며 돌고 돌아 ‘괜찮다, 하면 된다.’는 것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실패와 불행한 것은 없으며, 모든 상황은 배우며 성장하기 위해 놓인 길일 테니까.

나를 꽤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나를 놓아주는 시간에는 내 안에 꿈틀대는 것에 집중해 보기로 한다.

꿈틀대는 것들이 내가 그리는 꿈의 돌다리를 놓아준다. 그리고 앞으로 나는 그 돌다리를 하나씩 건너갈 것이다.

물론 건너가다 보면 물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하겠지.

그럼 그 참에 물놀이를 해 버릴 테고, 묵은 때도 벗겨버릴 테다. 그리고 다시 돌다리로 올라가 천천히 하나씩 건너 내가 그리는 낙원으로 도착하게 될 거라 믿는다.

그리고 다시 돌다리를 건너겠지. 그렇게 이어져가겠지.  


초록빛 햇살을 맞으며 차 한 잔을 마시고 글을 쓰고

멍 때리는 시간 동안, 나는 나만의 세상에 가 닿았다.

웃고, 떠들고, 차분히 나를 바라보고, 춤을 추고, 날아다니고..

오감이 서서히 깨어난다.

나를 깨우는 시간이다.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다.

나를 키우는 시간이다.

결국 나를 살리는 시간이다.

 


나는 이 시간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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