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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홍 Oct 17. 2022

시간의 향기

#1 Safari by Ralph Lauren

 Collecting, 시작은 늘 갑작스럽다


 시간이 유난히 더디게 흘러가는 월요일.

 지루한 일 얘기 대신, 오늘은 나의 몇 안 되는 취향이자 취미에 대해 몇 자 적어보려 한다. 인내심이라고는 쥐똥만큼인 내가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이어가는 몇 가지 행동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향수를 모으는 것이다. 대중적인 아이템부터 희귀템까지, 거실 벽 한 면을 채우는 장식장을 넘어 집안 곳곳을 가득 채우는 여느 향수 콜렉터들처럼 전문적이거나 집요하지는 못하지만, 향수에 대한 나의 관심과 사랑이 시작된 것은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처음 향수에 눈을 뜬 것은 순전히 엄마 때문이었다.

 외출 전이면 언제나 바비리스로 머리를 만지고, 정성 들여 메이크업을 하는 엄마의 모습. 버건디빛 벨벳 투피스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엄마는 집을 나서기 직전 항상 향수를 꺼내어 뿌렸다. 그 일련의 과정은 엄마만의 루틴 같은 것이었는데, 어린 내 눈에 그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매일 봐도 질리지 않을 만큼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달까.

 칙, 소리와 함께 흩어지는 무수한 입자들. 조금은 어두운 방안을 밝히듯 선명하게 퍼져나가는 파우더리한 향기. 나에게는 멀미가 날 것처럼 어지럽고 독하게 느껴지는 향이었지만, 어른 혹은 성인 여자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엄마가 외출 준비를 할 때마다 나는 그녀의 곁을 맴돌며, 엄마의 섬세한 손길이 마침내 향수에 가 닿는 그 순간까지 숨죽여 그녀를 감상했다. 그렇게 나는 향이 선사하는 어떤 느낌에 아주 서서히 젖어들고 있었다.

 마침내, 나만의 향수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 순간, 나는 향수에 완벽히 매료되었다.






Safari, 작은 여행


 엄마는 파우더리한 퍼퓸을 많이 갖고 있었는데, 그 향수들의 이름과 정확한 노트를 알게 된 것은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난 이후의 일이다.


 엄마는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다른 향수들을 뿌리곤 했는데 주로 랄프로렌의 사파리, 디올의 듄, 샤넬의 샹스를 데일리로 뿌리곤 했다. 하나같이 드라이하고 엔틱한 느낌의 향. 엄마의 향수 중 내가 가장 싫어했던 향조는 랄프로렌의 사파리였는데, 특유의 짙고 트레일이 긴 꽃향기는 어린 내게 울렁거림 그 자체로 다가왔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유난히 좋아하는 엄마가 그 향수를 남달리 아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나 싶다. 영화 속 자유분방한 메릴 스트립과 어딘가 겹치는 엄마의 이미지와 사파리는 꽤 잘 어울렸던 것이다.

 건기의 사바나. 광활하게 펼쳐진 대지 위로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텁텁한 로즈와 흙내음, 오렌지의 복잡한 향이 지나가고 나면 느껴지는 앰버와 베티버, 샌달우드의 묵직한 여운. 고풍스러운 위스키병처럼 정교한 컷팅이 도드라진 크리스털 보틀은 눈까지 즐겁다.


 디올의 듄은 또 어떤가.

 한낮의 모래 언덕 위,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듯 서 있는 한 여자가 떠오른다. 드라이한 피오니와 백합, 상쾌한 만다린과 베르가못이 차례로 느껴지고 스파이시한 로즈와 일랑일랑이 따라 올라온다. 앰버와 샌덜 우드, 머스크와 바닐라로 따뜻하게 마무리. 샹스도 마찬가지로, 하나같이 관능적이고 따스한 향조들이다.

 요즘 '취향 소나무'라는 말을 많이들 쓰는데, 엄마의 취향은 정말 소나무처럼 몇십 년이 지나도 한결같다. 근래에는 샤넬의 가브리엘을 두 통째 쓰고 있는데, 참 신기할 따름이다.


 30대 중반으로 달려가는 지금, 나는 엄마가 왜 그토록 그 향수들을 사랑했는지 이제야 이해한다. 물론 내가 랄프로렌의 사파리를 완벽히 소화하는 날은 앞으로도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다. 그녀의 아우라를 완성하는, 그녀를 완벽히 표현하는 엄마만의 향수인 것 같아서. 내게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엄마의 향수를 몰래 뿌리고 나온 아이처럼 보일 것 같다.






 Time Turner, 시간을 거스르는 법


 돌아갈 수 없는 날에 대한 향수(鄕愁)를 불러일으키는 향수(香水).

 한 장의 선명한 사진처럼, 향수에는 시간을 잡아두는 힘이 있다. 뚜껑을 열고 뿌리는 순간 수십 년 전의 어린 날로, 딱히 특별하지 않았던 과거의 어떤 날로 나를 순식간에 데려다 놓는다. 향수를 그저 부르는 게 값인 뷰티 아이템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것은 아직 그들이 향수를 더 깊게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라 생각한다.

 향수는 나를 표현하는 장치 이상의 의미를 갖는, 타임 터너(Time Turner)다.

 시간을 되돌리는 오브제는 판타지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게 향수가 가진 매력이자 내가 향수를 모으고 애정해 마지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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