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책 한 권>이란 한 문장을 봤을 때 역시나 가장 처음 떠올린 책은 바로 그것이다.
내가 여러 곳에서 누누이 말하고 적고 기록했던 책.
그 책만 떠올리면 곱디고운 벚꽃이 휘날리던 도서관을 우울하게 다녔던 취업준비생 시절과 늘 똥 싸는 기분으로 매일 야근하던 작은 출판사의 직원이었던 시절로 돌아간다.
스스로를 가장 볼품없고 초라하다 여겼던 그날들에서 나는 이 책을, 아니 이 책의 주인공 연수 씨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서유미 작가의 <쿨하게 한 걸음> 소설은 도서관 열람실에서 처음 만났다. 대학 졸업 후 너무도 막막해 도대체 뭘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토익만 죽어라 파고 있을 때 머리나 식힐 겸 킬링타임용으로 집어든 책이었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 읽기 시작해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 마음은 어딘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 연수는 서른셋의 나이에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회사에서 잘리고, 그제야 진정 자신이 원하던 공부를 해보겠다며 자아를 찾아가는 여성이다. 친한 친구들이 결혼을 하거나 뚜렷한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리는 걸 보면서 당연하게 자신에 대한 의심, 불안, 질투의 감정을 겪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자발적 공부의 기쁨, 조심스러운 미래를 계획하는 멋진 사람이었다.
스물넷, 그리고 스물다섯의 내가 여전히 방황하고 모든 것에 어설픈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무렵 연수 씨의 자발적 공부는 내게 작은 용기를 곳곳에 남겼다. 삼십 대에도 여전히 인생은 흔들리니까 미리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하거나 순수한 기쁨을 찾을 수 있는 나이가 삼십대일수도 있다고 일깨워주는 멘토로서 그녀는 현실의 부모님도, 친구도 말해주지 못했던 나의 가능성을 찾아주었다.
미래에 대한 의심이 들 때면 우주 어디에선가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연수를 생각하며 취업 준비 공부를 했고, 현재의 내가 너무 불안할 땐 그 페이지에 머문 연수를 보며 작은 책상에서 정말 재미없는 의학논문 원고의 오탈자를 손봤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지금은 이 자리에서 묵묵히 버텨야만 한다고 용기를 쥐어짜던 내게 책은 큰 힘이 되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형편없는 평론을 쓰고 있지만, 마감까지 넉넉한 시간이 남은 것도 아니고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사람들에게 비하면 턱없이 부족할게 분명하지만, 나는 도전하고자 하는 무엇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하루하루 시간을 때우듯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간극을 좁히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삶이었다. <쿨하게 한걸음 책 중에서>
어느 날, 책의 위 문장이 물에 물감을 탄 듯 서서히 마음에 번졌고, 그 길로 결심을 했다.
더 늦기 전에 혼자 떠나보자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그때를 만들자고.
생각만 할게 아니라 꿈과 현실의 거리감을 내가 직접 좁혀보자고 말이다.
작은 출판사에서 야근하면서 틈틈이 런던행 비행기 값을 살피며 비교적 학비가 저렴한 어학원을 찾고 어학연수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수집해 가며 첫 독립에 대한 계획을 짰다.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책장 속 연수 씨 덕분이었다.
“너는 여전히 늦지 않았고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어”라고 말해주는 그녀가 책 밖으로도 존재했기에 처음으로 나를 믿어보기로 했다. 스물여섯이라는 나이와 젊음 앞에서 연수의 응원이라면 한번 해볼 만했고, 그동안 억지로 외우던 타의적 영어 말고 런던에서 영국식 악센트를 듣고 외우는 자발적 공부의 기쁨을 직접 체득하고 싶었다.
다녀와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재취업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의 고민일랑 캐리어에 함께 싸서 들고 런던아이를 바라보며 해도 누가 뭐라 하지 못할 거였다. '내 인생인데 나도 내 의지대로 좀 살아보자'며 야심 차게 사직서를 내고 강남 영어회화 학원에서 한 달 동안 토킹을 연습한 후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공항 가는 내내 영국에서 국제미아나 되지 않을까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지만 그마저도 내가 감당해야 할 도전의 몫이었으니, 배낭 한 구석에 챙겨 온 <쿨하게 한걸음> 책만이 지도이자 든든한 백임을 믿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오후 6시, 짐을 부치고 엄마, 아빠와 헤어지고 혼자 출국을 기다리는 시간. 나의 용기와 무모함을 믿고 처음 시작해 보는 일 앞에서 마지막으로 카카오톡 프로필 창을 바꾸는 일만 남았다. 마치 이젠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고 마지막 다짐을 남기는 것처럼 한 줄을 쓰고, 나는 2012년 6월. 런던으로 떠났다.
"연수 씨, 고맙습니다. 잘 다녀올게요."
yes24에 응모했던 글입니다. <내 인생의 책 한 권>이란 주제로 썼습니다. 그냥 묵혀두기 아까워 브런치에 약간의 수정을 더하여 재발행합니다. 이 글을 읽는 내내 저는 또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있네요. 딱 이 정도의 날씨에 홀로 런던에서 마음껏 외로움과 불안을 겪으며 성장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날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듯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제가 있어야만 미래의 제가 또 성장해 있겠죠.
여러분들의 '내 인생의 책'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다들 어떤 삶을 살아오셨고, 또 살아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