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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Jan 09. 2023

아아 포기할 수 없는 생활 속 사치여


2023년이 되었지만 작년과 재작년이 그랬듯 올해도 특별한 감정이 없다. 어제에 이은 오늘이고, 작년에 이은 올해일 뿐, 아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6월부터 다시 한 살이 어려진다지? 서른일곱 살을 또 한 번 살게 되다니.


서른일곱이라.. 내 나이의 엄마는 아홉 살 딸인 나를 먹이고 입히고 재웠으며, 하루 삼시세끼 꼬박 밥을 차려내며 가정주부로서 온전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그 딸은 커서 삼실 칠세가 되어서도 자식은커녕 제 몸 하나 가누기도 벅찬 삶을 살고 있다. 우리의 삼십 대는 전혀 다른 세계로 흘렀고 아직도 철없는 딸은 일상 속에 부리고 싶은 사치 때문에 고민한다.


우리 가족은 17평 아파트에 중학교 때까지 살았고 그게 창피하거나 부끄럽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돈에 크게 자유로웠던 것도 아니었던 게 스무 살 때는 용돈 기입장에 딸기 우유 700원과 버스비를 쓸지 말지 고민했기 때문이다. 직장에 다니면서 어떤 친구들은 출근할 때 택시 타는 걸 자연스럽게 말하기도 했는데 나에게 그런 일은 좀.. 사치였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얘 돈 많이 버나보다"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그랬던 나였으니 당연히 옷은 무조건 인터넷에서 싼 거 위주에서 약간의 취향을 더한 것으로 사 입었고 가방도 비닐 재질의 무난한 것들을 골라 맸다. 비가 오면 특유의 강한 인조가죽 냄새가 났고 구두도 안양지하상가에서 한 켤레에 15000원 하는 것으로 몇 년 동안 신었다. 솔직히 패션의 '패'도 몰랐고 스스로를 잘 꾸밀 줄도 모르는 아이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시절이다. 내가 좋아하는 취향이라고 내세울 만한 기준도 없었거니와 그런 것들을 알아보기 위한 돈도 많지 않았으니 나름 평범하고 무난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겠고 살짝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진짜 특색 없는 20대를 보냈다.


그랬던 내가 알을 깨고 나온 계기는 런던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나서부터다. 세상에 힙하고 간지 나는 사람들이 죄다 거기에 모여 있었고 뭘 비싸고 고급스러운 것을 걸쳐서가 아니라 특유의 자연스럽고 당당한 그들의 취향이 잘 묻어나는 모습에 반해버렸다. 그들은 입고, 걸치고, 꾸미는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자기네들이 공부하는 방식, 대화하는 표정, 그런 문화를 공유하고 즐기는 행동의 바이브가 나의 뭔가를 건드렸고 아주 작은 부분, 이를테면 다른 건 다 상관없지만 신발만큼은 나이키를 신어야 한다거나, “아이폰 구려, 블랙베리폰이 짱이야” 등의 귀여운 고집이 그들이 찾은 고유한 취향으로 보였던 거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온 내가 가장 먼저 한 건 고등학생 방에 멈춰버린 나의 작은 방 인테리어를 바꾼 것이고 직장에서 번 월급으로 처음 백화점에 가서 가방을 샀다. 무려 30만 원대의 가방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진짜로 원하는 물건을 가격에 상관없이 샀고 거기서 온전한 소유의 기쁨을 느꼈던 것 같다. 그동안은 싼 게 비지떡이라는 생각에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억지로 취향이라는 말을 붙여 내 것으로 소화했던 것 같은데 그건 돈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거였다. 열심히 그리고 힘들 게 번 돈을 가치 있게 쓰는 방법 중 하나는 내가 정말 원하는 것, 갖고 싶은 것에 아낌없이 쓸 줄 아는 거였다. 안타깝지만 내 주변에는 아무도 그런 걸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자, 그럼 서른일곱 살의 나는 지금 그렇게 돈을 잘 쓰고 있느냐 묻는다면.


여전히 택시비가 아까워 웬만하면 버스를 기다리고 향 좋고 패키지가 이쁜 핸드크림은 한 번 걸러 한 번씩 맘에 드는 걸 산다. 하지만 그런 시간 속에서도 나름 좋은 물건을 사서 오래 쓰자는 마음으로 고가의 물건을 구입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으니 나름 생활 속 사치를 즐기고 있는 셈이다. 가끔은 집에선 잘 보지도 못하는 꽃을 사서 화병에 꽂아두기도 하고, 작년 크리스마스에는 10만 원짜리 생화 리스를 하나 사서 밤마다 전구를 켜놓고 그 아름다움을 음미하기도 했다.(아직까지 잘 살아있어서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 물론 그 생화 리스를 사기까지의 고민은 말도 할 것 없지만(열흘 넘게 8개의 넘는 리스를 비교하고 견적 받고 살까 말까 꿈에서까지 고민했... 다...) 매번 작은 전구의 스위치를 켰다가 끄는 수고로운 반복이 즐겁다. 비록 이번 한 철의 아름다움으로 생명을 다할지라도 조화에서 느낄 수 없는 생화의 분위기를 새롭게 사랑하게 되었다.


이케아에서 산 볼이 넓은 도자기 면기도 아주 잘 쓰고 있는 생활 속 아름다운 물건인데 파스타도 담아 먹고 라면도 먹고 비빔밥도 해 먹으면 작은 사치를 부리는 기분이 든다. 굳이 프라이팬째로 먹지 않고 혼자 먹어도 잘 차려 먹고 있다는 행위가 주는 뿌듯함. 그 기분도 일상 속 사치여서 좋은 것이다.


여전히 내가 갖고 있는 물건을 새롭게 정의하고 센스 있게 활용하는 법을 몰라 쇼핑하는데서 오는 만족감이 제일 크지만 가치 있게 돈을 써서 나의 취향 범위를 넓히고 섬세하게 다듬어 가는 과정이라 여기기로 했다. 불필요하지만 아름답고, 쓸모없지만 디테일이 사랑스러운 물건 혹은 행위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을 아니까 조심스럽게 유지하고 싶다.


알 크기가 다른 진주귀걸이를 여러 피스 사는 내가 있다. 예전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사치라고 여겼겠지만 지금은 미묘하게 다른 크기에서 오는 분위기를 안다. 디테일할수록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스타일과 분위기, 더 나아가 나라는 사람의 존재를 고유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걸 배우고 있다.


몇 달 전부터, 집에서 예물반지를 껴고 글을 쓰고 있다. 그동안 아낀다고 서랍 깊숙이 두었다가 지금이 가장 이쁠 때인데 더는 시간을 아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햇빛과 조명을 받을 때마다 프리즘을 일으키며 얼음판 위 요정처럼 키보드 위에서 문장을 쏟아내고 있는데 그 찰나의 순간을 목도하는 게 너무 즐겁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한 컷의 생활 속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까 싶었다.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넷플릭스에서 봤던 한 영화에서 화끈했던 옛 남자친구와의 사랑을 잊지 못해 그와의 과거를 밤낮으로 써대는 여주인공이 잠옷바람으로도 포기할 수 없었던 건 손가락에 끼어진 왕다이아 반지와 까르띠에 시계였다. 그 모습이 내 가슴에 오래도록 남았었나 보다. 그녀가 뭘 쓰고 기억하든 간에 빛나는 손가락과 손목으로 노트북을 두드리던 그녀의 모습이 우아한 잔상으로 남았다.


누군가는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에 대한 논리적인 답변은 못하지만 '그냥'이란 한 단어에서 이해를 구할 순 없을까. 사치와 허영이란 단어는 우리에게 과잉 감정을 일으키고 부정적인 표정을 짓게 하지만 우리의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생활을 반짝이게 만드는 구원일 수도 있다. 연예인처럼 화려하게 살아 볼 수도 없고 재벌가집 막내아들처럼 자유롭게 살 수 없는 우리의 삶에서 작고 소중한 사치는 삶의 감각을 넓히는 지점이고, 스스로에게 감동을 선물하는 방법은 작은 사치를 허락하는 것이다.


오늘은 지난번 앙드레 브라질리에 전시회에서 산 포스터를 액자에 담아 걸어 두었다. 역시 내게 우아한 영감을 주는 그림이고 그것을 등지고 책상에 앉아 크리스털 와인잔에 탄산수를 담아 마시며 글을 쓴다. 물론 반짝이는 반지도 잊지 않았다. 이 문장만 읽으면 글 하나 쓰면서 허영덩어리의 30대 여자가 별 짓을 다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이 행위로 지금 이 순간을 반짝이며 살아내고 있으니 그거면 충분하다. 덕분에 이렇게 글도 쓰니까!


아아 난 생활 속의 사치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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