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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Aug 03. 2023

환승인간



요즘 나는 한정연 작가의 산문 <환승 인간> 책을 읽고 있다.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이름으로 여러 역할을 하며 좋아하는 일을 더 좋아하는 마음으로 해보자는 내용의 책인데 읽는 내내 머릿속 한가득 채우는 말이 ‘소설을 쓰자 ‘는 거였다.


결혼을 하고 전업주부의 이름으로 살 때 다음 포털 사이트에서 블로그를 개설했던 적이 있다. 네이버 블로그와 브런치와는 별개로 또 다른 글 쓰는 자아, 더 깊게 말하자면 소설을 쓰는 다른 닉네임을 가졌던 것이다.


동경하던 작가의 이름을 빌려 여자 주인공을 만들었고 그녀도 나처럼 결혼 후 집에서 글을 쓰며 담배도 태우도 와인도 홀짝 마시는 그런 근사한 여류 작가의 인생에 대해 썼던 것 같다. 초반의 초반도 쓰지 못하고 일을 시작해 그 닉네임으로는 접속한 지 꽤 오래되었고 몇 주전 다음 사이트에 로그인을 하려 하니 블로그가 폐쇄되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당황하면서 이곳저곳을 클릭하며 그때 썼던 글을 뒤져보았지만 정말 흔적도 없이 공기 중의 먼지처럼 사라져 버려 아쉬웠다. 그래서 그 뒤로 다시 소설을 써야겠노라 마음을 먹었다.



왜 소설이냐면 나도 모른다. 에세이 작가로서도 크게 성공하지 못한 주제에 무슨 소설을 쓰겠냐며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만 의외로 유쾌하게 “뭐 안 될 것 있나” 싶은 마음이 든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을 썼다는데 나라고 뭐 못 쓰란 법이 있나 싶기도 했고 내 마음의 혼란스러움을 에세이의 형식이 아닌 소설의 주인공 뒤에 숨어 부끄러움 없이 내보이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희한한 건 이 마음을 먹자마자 뭔가 든든한 빽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본질적으로 이 소설의 이야기는 남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보다 나 스스로 읽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것에 가까웠고 고로 청소 노동자로 일하는 어떤 아주머니가 주인공인데 이름과 직업, 친구관계, 현재 상황들 몇 개를 추스르고 에피소드를 짜는 작업만으로 하루의 몇 순간이 재밌기 시작한 것이다.


출근할 때나 퇴근할 때 주인공 이름을 몇 개씩 후보군에 넣어두고 잘 어울리는 이미지를 찾는 일이 나름대로 꽤 진지했고 회사에서 틈틈이 메모장을 열어 그녀가 해야 할 말과 지켜야 할 몇 가지의 세계관을 적는 일이 즐거웠다. 아직 첫 문장을 쓰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벌써부터 내 뒤에서 나를 응원하는 것도 모자라 외롭고 불안한 마음을 들킬 때마다 아직 시작도 안 한 소설 뒤로 숨을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많은 것을 숨기며 드러내는 내 소설 속에서 그 말은 곧 “이것이 나의 모든 진심이자 진실이다”라는 선언이었다. 그건 내 삶의 자세이기도 하다. 자꾸만 자주 휘발되는 가치에 관한 것, 내가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 했던 것들이 지나가는 시간에 의해 가치 없음이 되어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소설 속에서 지켜보고자 했던 나. 여전히 내 안에서 가치로 남겨져 있지만 타인들에 의해 무가치해지는 무언가에 대해 써보고자 했던 것이다.

한정연, 환승 인간


의외로 이 공간은 아늑했다. 내가 지키고자 하는 인간들을 만들었고 몇몇의 고생을 통해 성장시키는 세계의 신이라도 된 듯이, 그 마음이 현실의 나를 지켜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녀의 세계관은 곧 내 생각과도 같아서 우리는 다른 공간에 살고 있는 도플갱어 같기도 했다.


공책의 몇 페이지를 그녀의 세계에 할애하며 깨달은 건 내가 당신을 창조해내고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 또 다른 나를 만들어주고 있는 거였고 언제 완성될지 모르는 소설 쓰기는 현실을 환승시켜 주는, 고마운 세계임에 틀림없다.




이 글 화면을 닫으면 다른 글 화면이 나의 환승처가 기다리고 있다. 가자,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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