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이란 숫자가 갖는 의미는 어디에 두어도 작지 않다. 결혼 10주년, 나이 10살, 가게 운영 10년 차, 직장인 10년 차 등등. 시간이 흘러 그동안 한 개의 숫자로 홀로 서 있다가 비로소 두 '1'과 '0' 두 개의 숫자가 만나 서로 기대어 안도감을 느끼는 모습도 보인다.
결혼생활을 10년 동안 해온 일은 다른 의미보다 좀 더 넓은 것 같다. 나 혼자 잘 살아와서는 안 되고 상대와 함께 발과 마음 맞춰 그 시간들을 걸어와야 했고, 더 나아가 확장된 가족 구성원 안에서 나름의 역할을 해내며 이루기도 했다.
즉, 내게 결혼 10주년이란 의미는 아내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며느리로서 살아온 시간도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결혼 초기에 브런치에 그런 글을 썼더랬다. 어머님과 며느리의 관계는 적절한 거리 두기가 좋다고. 마치 직장의 팀장과 팀원처럼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해 나가면서 각자의 롤을 맡아 사적인 영역은 크게 터치하지 않고 지내자는 식의 내용을 썼다. 지금 읽어보면 다소 오글거리고 현저히 내공이 부족한 글이긴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스텐스를 유지하고 있는 덕분에 감히 말하자면 며느리로서의 10년은 꽤 행복했다.
솔직히 어머님이란 사람을 겪을수록 '시'어머님보다는 한 명의 여성 혹은 누군가의 엄마, 그리고 딸과 자매의 모습에 더 크게 반하고 배울 게 많던 날들이었다. 우리가 결혼하고 나서 즉시 제사를 없애셨고 그래서 명절마다 즐겁게 서울로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녔다. 며느리 생일에 직장에 오셔서 점심을 사주시며 동시에 손수 떡을 사가지고 와 회사 사람들과 나눠먹는 기쁨도 누렸다. 정작 우리 부모님은 카톡 하나로 끝이었는데 ^^;
아, 작년에는 무려 떡케이크를 직접 만들어주셨으니 서른도 한참 넘은 늙은 며느리가 뭐가 예쁘다고 그리 큰 사랑을 주셨을까.
결혼 후 처음에는 자식에 대한 진하고 큰 사랑이 살짝 부담스러웠다. 남편과 도련님을 키운 얘기만 들어도 어머님의 희생은 머리를 도리도리 칠만큼 굉장했고 과연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이 염려스러웠다. 아마 내가 살아왔던 우리 부모님과의 관계가 보다 심플하고 간단해서 더 그렇게 느꼈을 수 있지만 과연 앞으로 우리 관계가 나빠지진 않을지 걱정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두려웠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부모님들은 집에 오실 때도 꼭 미리 전화를 주셨고, 함부로 현관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러 들어오시지도 않았으며 두 분대로 여행도 다니시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포장해 와 현관에 두고 가셨고, 심지어 친정 집에도 간간히 들러 꼭 제철 과일이라도 선물해 주고 가시는 정 많은 분들이셨다. 비단 그런 정성은 우리들에게만 전해진 게 아니라 요양원에 계시는 시할머님께도, 아픈 일을 겪은 형제자매에게도 아낌없이 나누고 베풀 줄 아는 어른이셨다.
우리가 선물해 드리는 화장품은 꼭 시할머님에게 가거나 이모님에게 돌아갔고 어머님은 싸고 용량 큰 홈쇼핑 제품을 쓰셨다. 그리고 또 좋은 게 생기면 자식들 가방에 쓱 넣어주시는 분. 결혼 후 명절 음식을 할 때도 다 해주시고 며느리는 그냥 옆에 앉아 재잘되며 숟가락만 얹었다가 설거지도 늘 아버님이 앞치마 먼저 둘러 조용히 집중한 입술을 내밀며 해주셨다. 확실히 해드린 것보다 받은 것들이 많아 이제는 '내가 딸인가?'싶을 정도로 편해진 부모님이었다.
꼭 10년이 되었으니 이제는 어떤 마음으로 내게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된다. 섭섭해서 하시는 말씀, 걱정돼서 하시는 말씀 모두 고깝게 들리기보단 다이렉트로 듣고 '그러실 수 있다'라고 흘리거나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마음이 든다. 이 모든 건 두 분이서 몸소 보여주셨던 사랑 덕분이었고 우리 부모님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해졌던 믿음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처음엔 그 모든 모습들이 어색했지만 결국 나를 변하게 만든, 그리고 나의 뮤즈, 롤모델, 영감을 준 시어머님의 사랑이다.
9년 전. 우리 부부는 결혼을 하고 이사를 해야 했는데 잠시 한 달의 시간 텀이 생겨 시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 남편은 출근을 했고 나는 혼자 남아 어머님과 아버님 셋이 함께 아침과 점심을 먹었다. 때론 각자의 방에서 무언가를 하고, 또 어느 시간이 되면 함께 모여 TV를 보거나 얘기를 나누거나 시장을 다녀왔다. 어색한 듯 어색하지 않고, 가까운 듯 가깝지 못했던 그 시간들 속에는 아버님과 단 둘이 집 주변의 도서관에 갔던 좋은 기억도 있고, 어머님과 한밤 중 드라이브를 다녀왔던 짙은 기억도 있다.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거다. 어머님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
직접 큰 SUV를 운전해 친구 어머니의 장례식장에 다녀오는 길을 동행했던 그 밤. 자식들 라이딩을 위해 처음 운전을 배우셨다면서 지금 생각해 보면 혼자 운전해서 어디든 다녀오는 일이 너무 좋다고 말해주셨던 그날 밤. 라디오에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밤에 내가 꿈꾸던 이상적인 엄마와 딸의 모습을 흉내 내어 보았다. 엄마는 늘 아프셔서 우리는 따로 시간 내어 함께 했던 기억이 없었다. 늘 아빠가 함께 있어야 했고 나도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엄마는 늘 내가 보호하고 지켜야 하는 사람이었고 어떤 이야기를 하든 간에 아픈 이야기와 건강해라, 밥 잘 먹어라 하고 귀결되는 대화가 답답했던 우리 사이에 어머님과 며느리라는 역할로 만난 새로운 우리의 모습이 신선했던 건 그 덕분이었다. 어떤 여름엔 파리바게트 빙수를 나눠 먹으며 아버님과 처음 만난 이야기를 들었고 어머님의 시댁살이를 담담하게 맞장구치는 내가 있었다.
10년이란 시간의 두께에 어머님과 나의 모습은 여러 형태로 변해왔지만 아직도 나는 그때의 기억이 아직까지 어머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마음에 큰 무게를 둔다. 마치 엄마와 딸처럼 소소한 데이트를 하는 기분인데 남편과 결혼하면서 합친 서재에서 발견한 양귀자 작가의 책 <모순>을 보고 어머님이 읽으셨던 책이란 말을 들으니 기분이 더욱 묘했다. 책으로도 통하는 우리 사이라니..! 남편이 어렸을 때 어머님은 아파트 단지 트럭에서 책을 종종 빌려 읽곤 하셨다는데 그 젊은 새댁의 모습이 어쩐지 나처럼 비쳤고 그래서 더 좋아졌더랬다. 가끔 어머님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책 한 권을 선물해 주실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이상하게 기쁘다. 어떤 책이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고 책이라는 매개가 우리 사이를 더욱 근사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서이고 책에서 전달되는 서로의 어떤 결이 꽤 가깝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먹는 모든 음식과 입는 옷, 화장품을 아껴가며 남편과 자식들의 보험은 철저하게 들어 두셨고 덕분에 지금 만만치 않은 연금으로 아쉽지 않은 노후 생활을 보내고 계신 어머님을 닮고 싶단 생각을 한다. 오직 마음으로만 사랑을 전하시는 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여전히 자식들에게 아낌없이 베푸시는 어머님을 보면 좋은 어른이란 옳은 말과 겸손한 지혜로 사람을 상대하는 것 외에도 어려울 때 망설임 없이 금전적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걸 배운다. 늘 남편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나는 노후를 어머님처럼 보내고 싶어."다. 건강을 위해 하루 만보씩 걸으며 운동도 하시고 때 되면 자식들에게 좋은 옷 한 벌 정도는 척척 사주실 수 있는 경제력을 두루 갖춘 어머님은 나의 노후 뮤즈다. 어머님이 살아오신 성품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몇몇 장면들 중엔 어머님이 입원해 계셨을 때 친구분들이 두세 번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몇 번씩이나 병문안을 오신 일이 있다. 정작 며느리인 나는 회사 핑계로 한 번 밖에 찾아뵙지 못했는데.. 직접 만든 빵이나 간식을 들고 몇 차례나 어머님을 뵈러 오셨다는 친구분들은 그동안 어머님이 주변 사람들을 어떤 마음으로 대해 왔는지 알려 주셨다. 과연 내가 병원에 입원하면 내 곁엔 누가 와줄까?
이 세상에 말만 번지르하게 읊어대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단 한 마디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한 장의 사진으로 인생을 유추하는 시대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행동으로 본연의 빛을 드러내는 사람은 드물다. 내게 시어머니는 지극한 효심으로 구순의 친정엄마를 살뜰하게 보살피고 매일 아침 수고를 들여 일흔의 남편 아침을 챙기는 것은 물론, 마흔 넘은 장성한 자식과 며느리의 안녕을 위해 새벽 기도를 하시는 롤모델. 어쩌면 여전히 나보다 더 열정적으로 주변을 살피며 자신의 할 일을 찾아 억척스럽게 하는 어머님이 보기에 불편할 때도 있지만 그것이 어머님이 가진 고유한 힘이자 자신을 지켜내는 빛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우리가 만난 지 10년째라서 일 것이다.
소설 <밝은 밤>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어머니는 자기 신념이 강했고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사람이었어요. 나를 데리고 늦가을에 대구로 피난을 가는데 어머니가 바들바들 떨던 것이 기억나요. 자꾸 농담을 하면서. 나는 어머니가 추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떨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어머니는 일평생이 그런 식이었죠. 바들바들 떨면서도 제 손을 잡고 걸어갔어요. 어머니는 내가 살면서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어요. 무서워서 떨면서도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 나는 어머니를 닮고 싶었어요."
무서워서 떨면서도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
이 글을 읽으며 자연스레 떠오른 사람은 당연히 우리 엄마. 그리고 이상하게도 어머님이었다. 어머님이야 말로 자신이 살아온 경험과 감각으로 우리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며 자칫 우리의 무례함을 공평하게 끌어안는 포용력을 내보이는 동시에 자신의 모순된 행동은 얼른 거두어 다시 바로 고치시는 분이다. 고단한 삶을 기꺼이 통과하고 그것을 보다 선한 영향으로 나눠주는 사람. 10년 여의 결혼 생활은 남편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이해하는 마음을 수련하는 과정이었을 뿐 아니라 좋은 어른을 만나 그 사람의 인생과 질감을 확인하는 날이기도 했다.
한 남자를 통해 우연히 만난 우리 둘의 모습이. 앞으로 10년 더 흐른 우리는 또 어떤 관계로 남아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