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딩 셀프 촬영 특집
'선명한 기억보다 흐릿한 잉크가 더 오래간다.'
지나가버린 시간 속에 남아있는 흔적들을 들춰보며 울고 웃고 하는걸 워낙에 좋아하는 사람들 둘이 만났는데 둘 모두 기억력은 메멘토급이니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이 순간의 행복함을 기억하려면 기록해 둘 공간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어.
매일 일기장처럼 적진 못하더라도 돌아보고 싶은 기억이나 여행. 혹은 미래의 너에게 '예전 너의 부모가 이랬었다. 우리도 젊었었지?'라고 보여줄 거리들을 기록해두고자 이렇게.
글을 잘 쓰진 못하지만 분명 하나둘 덧대어 쌓이면 무엇보다도 큰 재산이 될 테니 더 늦기 전에 시작해보려고.
시작.
이렇게 미래의 너, 혹은 너희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보기로 한 그 시작은 2016년 둘만의 특별한 결혼식을 계획하면서부터. 적어도 '우리 둘이 결혼해요'라고 전할 때 모두가 진심으로 축복해 줄 수 있는 결혼식.
거리가 멀고 주차는 쉬운가? 누구는 무탈하게 잘 왔을까? 손님이 예상보다 적지는 않을까, 혹은 음식은 맛이 없지 않을까 따위의 고민을 하며 보내는 1시간의 결혼식은 조금 속상하겠다 싶었거든. 인생에 한 번이잖아.
먼저 사진만큼은 둘이 찍기로. 그래도 사진과 시각예술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인데 이것 만큼은 다른 사람의 도움보다 우리 둘이 하나하나 해 나가며 한 장의 사진 안에 여러 추억을 덧대는 일을 하고 싶었거든. 그래서 좋은 곳을 찾아다니는 여행을 하며 사진을 남기기로 했어.
먼저 시작은 제천 배론성지.
둘째 날은 군산 철길 마을.
몇 년 간 진행해온 특별한 프로젝트 덕분에 철길에 대한 묘한 감정이 생겼어. 그래서 다음 촬영은 군산의 철길과 마을이 공존하는 곳으로 찾아가 봤지. 가기 전에 이마트 들러서 옷들도 사고, 소품들도 사고. 부끄럽지만 우리의 셀프 웨딩 사진 대부분의 소품과 옷은 군산 이마트에서 구매한 거란다...
군산에서 조금 떨어진 이름 모를 곳에서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이런 재밌는 촬영도 했었어. 제천의 할머니 댁에서 빌려 온(가져온) 나무 의자와 식탁보로 배경을 세팅하고 이마트에서 사 온 옷들을 입고 사진 수백 장을 찍어서 그중 선택한 한 장의 사진. 여전히 이 사진에도 손에는 리모컨으로 사용한 스마트폰이 들려있네...
마지막 날은 사실 웨딩촬영의 메인 촬영지인 변산반도 국립공원과 그 안의 채석강.
이곳은 원래 친구와 20대를 마무리하며 125cc 스쿠터를 타고 서울에서 목포까지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소였어. 그 당시 언젠가 누군가와 꼭 같이 와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장소였는데 이렇게 7년 뒤에 함께 왔지. 그리고 셀프로 웨딩 사진을 촬영한다면 꼭 추천해주고 싶은 장소이기도 해. 장소가 좋아서 예쁜 옷 멋진 신발이 없어도 독특한 느낌을 내어주거든.
역시나 마트에서 구매한 우산과 전등 등을 소품으로 사용하여 해 질 무렵 채석강에서 윤혜의 맨발로 진행 한 촬영. 의미 없어 보이는 소품들이 배경과 빛과 조화를 이룰 때 참 맘에 드는 사진들이 나오는 것 같아. 그래서 이곳에서의 저 사진들은 우리가 가장 맘에 들어하는 사진들이야 :)
사진을 촬영하며 노는데 해는 모두 졌고,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바닷가라 그런지 모기는 또 얼마나 많은지.
만족스러운 사진도 찍었겠다, 이제 환경이 너무 힘들어서 바로 철수하려 준비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
후에 얘기하겠지만 우리는 하객이 참석하는 결혼식을 안 하기로 했거든. 우리 둘이 오롯이 주인공인 그 이벤트를 안 하기로 한 데는 둘 모두의 행복한 결정이 있었지만 그래도 뭔가 아쉽고 속상한 거야. 사진만큼이라도 둘 만이 주인공인 그림을 그려보자. 배경, 소품 모든 게 생략된 둘만의 사진. 그래서 철수 전에 비 내리는 채석강에서 엄마랑 아빠는 또다시 포즈를 잡고 셔터를 눌렀어 :)
사실 저 사진을 마지막으로 많은 셀프 웨딩 사진을 남겼지만 우리 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점으로 이루어진 디지털 색채의 모음이 아니라 이 위에 수놓아진 여행의 즐겁고 행복한 기억들이었던 것 같아.
루트와 사진 구도를 함께 고민하고, 여행길 위의 맛집들을 찾아다니고, 생전 처음 가보는(그리고 다시 가 볼일이 있을까 싶은) 군산 이마트에 들러 옷과 소품들을 쇼핑하는 것 따위의 기억과, 셔터 하나하나를 스마트폰으로 누르고 천천히 확인하는 그런 번거로움까지 말이야.
비록 다른 커플처럼 날씨 맑은 날 좋은 스튜디오에서 이용한 비싼 조명과 스텝들, 센스 있는 화장과 드레스는 사진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 자리를 우리 감각과 추억으로 채운 둘 만의 웨딩사진. 그 어떤 경험보다도 행복했고, 값진 사진들을 얻었어. 수 십 년 후에도 촬영자의 얼굴은 어땠었고 어떤 지시로 이런 포즈를 잡았는지 기억 못 하는 그런 사진이 아니라 셔터를 누르던 순간의 나의 표정은 어떠했고 어떤 의미로 이런 포즈를 우리 둘은 잡았는지, 그날의 공기와 우리가 나눈 대화는 무엇이었는지 하나하나 기억나는 그런 사진들. 역시 사진이라는 건 결과보다는 그 과정이 중요한 것 같아.
오늘은 우리의 스스로 촬영한 웨딩 사진들로만 시작했지만 앞으로 채워질 이 곳의 많은 이야기와 사진들. 이것들이 미래의 네가 우리 둘을 이해하게 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기를.
잘 부탁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