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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rlieBrown Sep 15. 2015

[소설] 무진기행

무진이 무진(霧津)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하여(2013.1.28)

#1. 서울과 무진그 공간적 대비 기존의 해석     


서울 : 무진
=일상의 공간 : 일상으로부터 탈출의 공간/여행
=지속적인 : 일시적이면서 불규칙적인
=현실 : 환상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인간은 때론 비일상적인 공간을 필요로 한다.

아폴로적 삶을 살더라도, 때때로 디오니소스적 도취가 필요하다.

그래야 인간은 그 자신의 현실적인 삶을 유지해 나갈 수 있다.

소설, 무진기행에서의 무진은, 바로 주인공에게, 그러한 디오니소스적 도취를 일시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는 공간이다.

서울이라고 하는 일상의/규칙적인/현실 속 공간으로부터, 

잠시나마, 무진이라고 하는 비일상의/불규칙적인/환상 속 공간에 머묾으로써, 

그는, 다시금 자신의 현실 속 삶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주인공은, 우리 현대인의 표상이며,

이 소설은 무진을 통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 무진은 진정한 탈출의 공간이었을까?     


여기까지가 제가 알고 있었던, 일반적인 무진 기행에 대한 해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나자, 전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진이라는 공간이, 주인공이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공간이라고 한다면,

그 공간에서의 그의 시간들은, 활기차고 즐겁게 제게 다가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무진 기행을 다 읽고 났을 때 제게 처음부터 끝까지 남은 감정은 오직, 씁쓸함 뿐이었습니다.

무지 기쁘지도 않고,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고, 마치 안개처럼 애매모호한,

제 보기에 주인공에게도,

무진은 그런 공간이었을 뿐입니다.     


그 애매모호한 느낌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무진이 진정으로 일상으로부터 탈피하는 공간,

일상에서 충족시키지 못했던 그 무엇, 그것을 일시적으로나마 충족시키는 공간,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죽은 미친 여자를 봤을 때 떠올렸던 어렸을 적 자신의 모습, 그것을 생각해 봅시다.

전쟁의 시기, 주인공은 전쟁에 나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나가지 못했고,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주인공은 골방에 박혀있었습니다.

담담하게 쓰여있으나, 주인공이 그로 인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는 그의 일기의 한 구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머니, 혹시 제가 미친다면 대강 다음과 같은 원인들 때문일 테니, 그 점에 유의하셔서, 저를 치료해 보십시오....."

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수음(手淫)뿐이었지요.

그것이 그 상황에서 그가 유일한 게 선택할 수 있는 일시적인 '탈출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사람의 본래 원하는 바를 일시적으로나마 이루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가 선택한 탈출구는 진짜 탈출구가 아니었습니다.

탈출하지 못한 채, 단지 그 감옥 안에서 일시적으로 자기 현실을 잊게 해주는  도취제일 뿐이었지요.

즉 그는 수음을 통해 자기 욕망을 일시적으로라도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욕망을 왜곡된 형태로 표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진도 딱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은 현실에 갇힌 골방이요, 무진은 수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서울에서 주인공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결혼을 할 때 우리는, 궁극적으로 어떤 걸 꿈꾸나요?

사랑, 서로의 존재를 통해 행복을 느끼고, 상대의 행복을 위해 행동하는.

그러나 주인공은 선택한 결혼은 어땠습니까?

자기의 현실적 삶의 수단으로써,

결혼의 대상을 찾았고, 선택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진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그 길을, 적어도 결혼에 있어서는 택할 수 없었습니다.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지요.

아마 거기서 오는 고통이, 그 안에 내재에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도피하여 내려온 곳이 바로 무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서의 만남은 어땠습니까?

사랑이었을까요?

조에게 박군의 연애편지를 모두 보여주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주인공은 하선생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다시 어서 만나고 싶다고 했지요.

왜 그랬을까요?

제 보기에, 이것은 이 사람을 함부로 대해도 되겠다는, 책임질 필요 없이 마음 편하게 만나도 되겠다 하는 그런 안도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순수한 사랑(오직 관계 그 자체에 충실한 사랑), 오직 박군만이 그렇게 그 사랑을 꿈꾸고 하고 있는데, 하선생은 그걸 이용하고 있으니, 뭐 자신도 그녀를 순수하게 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정당성이 생겼다고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결코 하선생과의 만남에서, 현실에서 자기 본연의 사랑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일시적인 도피처로서, 자기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충족시키고 있을 따름이지요.

그가 그녀에게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색했던 이유는, 그가 진정으로 그녀에게 사랑을 느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마지막에 편지를 찢어버린 것은,

자기 자신이 일상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임과 동시에,

그 자신이 거짓을 쓰고 있다는 데서 찾아오는 부끄러움에서 비롯됐을 것입니다.      


일상의 공간도,

일상으로부터 도피한 공간에서도,

그는 자신이 욕망하는 그 무엇을 충족시키는 경험을 하지 못합니다.

아마 그는 평생 그렇게 살 것입니다.

한 번도, 사랑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지 못한 채.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택한 공간에서조차, 자기 자신의 진짜 욕망을 충족하지 못하는 그 현실,

제가 느꼈던 씁쓸함이라고 하는 감정은, 바로 거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3. 익숙한 현실 = 당연한 현실


그런데 더 씁쓸한 것이 있습니다.

그 골방에서의 주인공이 느꼈던 <쓸쓸하다>라는 그 감정, 그 감정에조차 공감하지 못할 만큼,

자기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그 무엇을 추구하지 못하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도 아무런 느낌을 갖지 못할 만큼,

그는 그러한 자기 삶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그의 자아는 자기의 모든 힘을 잃었습니다.

그는 그저 유전자의 생존을 위한, 스스로의 도구가 되었을 뿐입니다.


# 4. 우리의 삶은?


우리 스스로는 어떤가요? 

우리가 현실적인 삶이라고 했을 때, 그건 어떤 의미였던 가요?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중고등학생은 공부 이외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대학생은 스펙 이외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는 삶아남기 위해, 일 이외의 대부분의 것들을 포기해야만 하는,

등따시고 배부르게 사는 삶만을 위해, 다른 대부분의 것들을 포기하는 그 삶만을,

우리는 한국에서의 현실적 삶이라고 하지 않나요?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아마,

(해외) 여행과, 맛있는 음식, 드라마, 스포츠 등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아마도, 무진이 되어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야, 우리가 이미 당연하게 살고 있는, 그래서 이러한 삶만이 '현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바로 그 현실 속에서도, 잘 견디며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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