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18. 파리, '이슬람 증오를 넘어…무슬림과의 '프리 허그'' 기사를 읽고
# 1.
모든 극단주의자들은 서로를 증오함과 동시에 더 없이 사랑한다.
증오할 그 대상의 존재가 바로, 그 자신의 존재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대를 증오하기에 폭력을 행사하고,...그 폭력을 통해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평화가 깨지고, 그 깨진 틈으로 스며오는 분노와, 증오, 두려움과 공포는,
일반 시민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그 부정의한 폭력에 다시금 자신들을 기대게 만든다.
그렇게 극단주의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 간다.
그러한 부정의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에겐 두 가지가 필요하다.
그 어떤 폭력의 공포가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자신의 비판적 이성을 깨워두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증오를 넘어,
내 적이라고 말해지는 이들의 증오/공포/두려움/아픔 또한 함께 느끼고자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적으로부터, 부정의한 권력로부터 지켜낼 수 없다.
파리에서 발생한 연쇄 테러는 수많은 파리 시민들을 공포와 증오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그러한 전시 상황에서조차,
진짜 자신들이 지는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자기 곁의 무슬림을 안아주며,
프랑스 시민으로서의 고결함, integrity을 지켜내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http://news.jtbc.joins.com/html/927/NB11095927.html
# 2.
일베충, 맘충, 동남아 새끼들, 전라디안, 김치녀, 좌빨, 종북이란 말들이 만연한 이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와 같은 고결함을 지켜내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한국 사회는, 철저하게 서열화된 대학 구조를 바탕으로,
끝없는 타자와의 경쟁과, 주어진 지식의 무조건적 암기를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사회다.
기득권의 빵 한 조각은,
오직 그 요구에 철저하게 순종한 이들에게만 나눠진다.
한국에서 태어난 거의 모든 이들은,
이러한 교육 시스템에서 12년간 자라나게 되고,
그 가운데서,
본래 타고난, 호기심이라는 이성의 빛과, 공감이라고 하는 사랑의 빛은,
배양되는 것이 아니라 말살된다.
그 호기심과 공감이 사라진 빈 공간에는 대신,
아마도 극단주의라는 바이러스가 배양되어 왔을 것이다.
# 3.
언제쯤 우리는, 우리 사회는, 이 바이러스를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
이 기득권의 수혜자인 나는,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항상 깨어 있으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2000년 전에 예수는 이미 이렇게 말했다.
예수는 그것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길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진리를 표현하는 명제는 그처럼 단순하기 마련이다.
다만, 그 진리를 깨닫고, 삶으로, 제도로 옮기는 길은,
그 명제의 단순함만큼 단순하지는 않다.
생을 충분히 즐기에도 벅찬, 이 주어진 삶의 시간에,
이 땅의 정의와 윤리를 위해 내 삶의 시간 중 일부를 내어놓는 일조차,
내겐 참으로 버거운 일이다.
그렇지만,
이미 나의 세계에 인식된 부조리를, 마치 없는 일마냥 눈감고 내 행복만을 위해 사는 일 또한,
내게 버거운 일인건 매 한가지다.
예수는 자기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갔고,
전태일은 시너와 라이터를 들고 청계천 평화시장 한 거리로 갔다.
자신이 예수가 아니고, 전태일이 아닌 대다수 사람들은,
자기 삶의 행복만을 위해,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믿는 선에서, 삶을 살아간다.
아마도 내가 살아갈 삶의 꼴은,
그 두 삶의 중간, 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함께 살아갈 그 누군가도,
이 어딘가에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