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用之大用(2010.8.31)
'시' 그것은 무용하다.
오늘날 우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어찌보면,
그것은 다이아몬드처럼 사치재인지도 모른다.
아름답기는 하나, 아무것도 생산해주지도 못하므로.
그것은 먹고 살 여유가 있는 풍족한 가정에서 생활 하는 교양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만,
소비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김용택 시인의 하소연처럼,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는 시가 죽어간다.
아니,
이 사회에서 이미 신은, 그리고 시는 죽었다.
그것은 오직 소수의 사람들에게서만 읽혀지고,
그것의 껍데기만이 남아 청소년들에게 전시되고 있다.
시가 죽은 사회
그럼 뭐 어떻다는 말인가?
어차피 무용한 것 하나가 사라진 것.
그것이 없이도 이 사회는 잘만 굴러간다.
이창동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시, 무용한 그것이 이 사회에서 무엇인가?
김용택 시인의 강의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시란 '보는 것'이라고.
제대로 보고, 그를 통해 시상을 얻어서, 그를 풀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시'다.
미자는 그럼 시를 쓰기 위해 무엇을 보았는가?
아름답고도 찬란한 자연,
밝은 태양 아래 잎들을 한웅큼 품은 나무와
깨어짐을 통해 달콤한 맛을 내는 살구,
보랏빛의 싱그러운 꽃들을 그녀는 보았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을
그 인간 사회의 추악함을 보았다.
한 소녀가 죽었고,
자신에게 얹힌 짐의 무게를, 그녀는 도통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짐을 얹힌 인간들은
그녀가 졌던 그 짐에서 오는 고통에, 아픔에도 아무런 관심도 없다.
부모들은 자기 자식의 장래를 위해,
선생들은 학교의 명예를 위해,
기자들은 한 건의 기사를 위해,
그 소녀의 고통을 숨기려고도 하고, 드러내려고도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 고통을 보고 함께했으나
어찌하랴? 먹고 살기 위해서 그녀의 고통이 삶의 제물이 되어야함을.
미자는 관계의 이면을, 차갑고 냉혹한 사람들의 이기심을 보았고,
거기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보았다.
그러다
결국 그녀는
가장 중요한 것을 보고 만다.
찬란한 자연 속에
이기적이고 추악한 인간의 껍데기 속에
그 안에 살고 있는 꺠끗한 자신의 영혼을,
그리고 그것이 짓고 있는 눈물을.
그녀가 떠나고 남긴 것은
단순한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 안에 살고 있던 아네스의 고백이다.
아직 자기 자신이 인간으로서 살아있음을.
어둠 속 빛으로서, 생명으로써 아직 자신이 숨쉬고 있음을 언명하는 인간선언서이다.
2010년 한국 사회에서
시는 무용하다.
그러나,
그것은 시 자체가 무용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만큼 천박해져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자본주의적 소비를 통한 육체적, 정신적 만족감만을 추구하는데 바쁜 나머지,
이 인간선언서가 아무런 울림을 주지 못할 정도로,
혹은 울림을 얻도록 시를 읽을 여유조차 갖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둔감해져 있다.
우리 자신이 무엇에 둘려 쌓여 있고,
우리 자신이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우리 자신이 무엇을 내면에 갖추고 있는지,
전혀 돌아볼 마음의 여유조차 없다.
시가 죽은 사회는,
돌아봄이 결여된 사회는,
인간이 더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회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시는
그것이 무용하면 무용할수록,
그 사회에서 더더욱 필요한 존재가 된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잠자고 있던 사람들에게 던져진,
하나의 짱돌이요, 말씀이다.
최근 이 시가 프랑스 사회에서 크게 흥행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몇 달전 한국 사회에서는 영화진흥위원회가 이 작품에 0점을 주었다는 소식과,
감독에 대한 예의차원에서 시가 각본상을 받은 것 같다는 현문화부장관의 볼멘소리와,
이 작품이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해 안타깝다는 이창동 감독의 탄식이 함께 들려왔다.
정작 시가 필요한 이들이 그것을 보지 않는,
그래서 스스로를 더 돌아보지 못하는 이 사회의 현실이 더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