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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만 Oct 31. 2020

2_4. 기술적 표현과 창의성

미술을 개인의 사상과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해 온 분야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초기 미술은 가장 앞서가는 기술의 한 분야라고도 할 수 있다. 한때 미술은 사물을 어떻게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균형감 있게 보이게 하느냐가 최대 고민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카메라의 원리를 처음 실험한 것도 미술가에 의한 것임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인체를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인체의 해부도 미술가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다.


정확한 사실 묘사를 위해 사용한 ‘옵티 큐라’ - 이것이 사진기의 원리로 발전하였다.

    지금과 같이 미디어가 발달하기 전 그림은 지금의 영화와 같은 가장 강력한 미디어였기에 왕이나 종교, 혹은 역사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활용하였다. 그리고 그 그림을 통해 대중을 선도하고 선전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미술가는 그림의 목적에 따라 사실을 과장하거나 왜곡하고 더욱 흥미진진하게 보여주기 위한 연출도 해야 했고 때론, 그것을 보다 현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투시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하물며 대상의 색을 표현하기 위한 물감의 개발도 미술가는 고민해야 했었다. 좀 더 확대하자면 귀족과 종교단체를 투자자로 투자유치 설명회나 마케팅도 해야 했을 것이다. 마치, 현재의 영화 제작업체나 CG 개발부에서처럼 말이다.     

 

그런데도 미술가의 창의성은 야만스럽게, 혹은 찌그러진 진주처럼, 그저 인상만 남기는 표현으로 미술을 도구 삼아 발휘하였으며, 그리고 그것은 훌륭한 미디어가 되었다.   

  

높은 건물과 뾰족한 첨탑, 수직적이고 직선적인 느낌, 스테인리스 글라스를 통한 빛, 우리는 이를 고딕 양식(Gothic)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러한 양식의 이름은 이탈리아의 유명한 건축가이자 화가였던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가 ‘고트족’ 즉, 당시 알프스 너머에 사는 민족으로 고대 로마를 침략했던 이민족의 이름을 빗대며 “참된 고전을 배운 적이 없는 야만인들은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으나, 그것은 고전 세계의 소박한 아름다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첨탑과 뾰족탑, 기괴한 장식과 불필요한 장식을 모아 놓은 잡탕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말에서  “고트인스럽다”라며 야만스럽다는 뜻으로 이어져 지금 우리가 아는 고딕이란 이름이 되었다.     

   

중세의 대표적인 고딕 양식

이름의 유래가 어찌 되었든, 고딕 양식은 신의 존재와 말씀이 더 넓은 공간과 빛을 통해 감각적으로 느끼게 할 수 있는 기술적 목적으로 프랑스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확산하여 12세기에서 13세기, 르네상스 전의 유럽을 대표하는 예술 양식이다. 창의적인 양식이긴 하나 이 역시 기술과 종교를 위한 효율적인 목적으로의 창의력이었다.


이후 르네상스에 들어 본격적으로 인간성 회복의 움직임으로 인해 ‘눈에 보이는 대로의 세상을 보자’라는 미의 관점으로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로 대표되는 완벽한 미술의 르네상스가 탄생되었다. 이는 완벽한 성공을 이뤘다. 대상의 재현은 조화로웠고, 균형적이었다. 그러나 너무 완벽한 것이기에 그 이상 어떠한 창의력을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완벽에도 새로운 창의성은 발휘되었다. 


여기, 두 개의 다비드 조각상이 있다.

        



위쪽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아래쪽은 베르니니가 표현한 다비드이다. 


르네상스의 절정기에 탄생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숭고 그 자체였다. 하지만, 골리앗을 향해 돌을 던지려는 순간에 멈춰 있는 오른쪽의 다비드는 보는 이로 하여금 다음 순간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가 던지려는 돌은 골리앗을 맞췄을까?,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비너스의 목선, 뒤돌아보는 순간 관객을 응시하는 여인, 이들의 르네상스 회화 같으면서도 어딘가 다른 모습을 보인다. 르네상스 후기의 예술가들은 그들이 빠진 숭고함이라는 매너리즘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찾으려 했다.     

    

그 결과 17세기 프랑스에서 바로크(Baroque) 예술운동이 탄생했다. 


하지만 이러한 양식이 처음 선보일 때 사람들은 경멸하였다. 그 때문에 르네상스에 일궈놓은 예술에서의 고귀함을 일그러뜨렸다 해서 ‘찌그러진 진주’를 뜻하는 포르투갈어 바로코(baroco)라 불렀다. 그리고 그 이름 자체가 ‘바로크’라는 예술사조가 되었다. 바로크 예술가들은 모든 걸 다 보여주지 않거나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생략하며 작품 외적으로 무언가를 상상하게 했다.    

  

고딕은 종교의 목적으로 기술적 공간 활용을 위해, 르네상스는 인간성 회복을 목적으로 한 사실 재현의 기술, 극적인 연출을 위한 바로크…. 이처럼 창의력은 언제나 과거의 한계를 무너뜨리려 탄생했다. 비록 그 시작엔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였지만 말이다. 그들은 그들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언제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 했다. 그렇게 창의성은 누군가에 의해 시도되고 공감한 몇몇 이에게 이어져 확산하며 하나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색다른 창의성을 시도한 사례를 들어보자.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543)’의 ‘대사들’이라는 그림은 단순한 사실적 표현으로 구성된 그림으로 보이지만 이 그림은 전통적인 표현기법에 인간의 욕구와 그 욕구를 창의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2단으로 구성된 탁자의 상단부에는 천구의, 해시계 등 천체를 연구하는 도구가 놓여있다. ‘천구의’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떠오르게 하며, 다면의 해시계에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1492년에 시간이 맞추어져 있어 새로운 발견의 시대를 이야기한다. 대항해 시대를 통해 들어온 신기한 물건을 영원히 자랑하기 위해 그리려 연출한 정물들이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 The Ambassadors ]

하단부에는 지구의, 수학책, 줄이 끊어진 류트(lute,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유럽에서 유행한 기타와 유사한 현악기)와 피리, 찬송가 등이 있다. 조화의 상징인 류트의 줄이 끊어져 있다는 것은 ‘구교’와 ‘신교’의 불화를 암시하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류트 옆의 찬송가는 신·구교 간의 조화로운 화해를 기원하는 화가의 염원을 담았다. 

이처럼 정물을 통해 이 그림의 의뢰자가 원하는 소망과 뜻을 창의적인 배치를 통해 담으려 했다. 그리고 아랫부분, 조금 괴이한 형상이 보인다. 


 뒤틀린 해골이다.     

     



홀바인은 원근법의 극단적인 형태인 왜상(anamorphosis) 기법을 사용하여 그림 속에 비밀을 숨겨 놓았다.     

그가 이렇게 권세와 부귀, 지식과 교양을 두루 갖춘 인물의 초상을 그리면서 죽음의 이미지를 곳곳에 숨겨 놓은 이유는 그 어느 것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그러므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작품의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작품을 의뢰한 ‘드 댕트빌’의 좌우명이기도 하였다 한다. 


모든 것은 유한하고 덧없으며, 죽음은 항상 우리 곁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진실한 가치에 접근하는 길일 것임을 상징과 은유의 방법으로 창의적으로 표현하였다.     



사물을 정확히 재현하기 위한 기술, 


그 기술을 통해 남들과 다른 차별적 재현을 하려는 시도, 그리고 그 재현하는 형상에 상징과 은유를 담아 새로운 이야기를 담으려는 예술적 노력은 미술이라는 한정된 화폭이나 공간 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든 창의적 표현을 하려는 예술가의 노력과 함께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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