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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오이 Oct 12. 2022

클래식이 우연히 들리면

소멸을 바라던 낮과 밤들은 여타의 낮과 밤처럼 어쨌든 지나갔고 나는 이제 안락의자에서 잡니다. 여전히 침대 위에 누워 잘 수는 없지만 사람처럼은 살고 있으니 더없이 기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느 것에도 집중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책을 펼치긴 했으나 검은 건 글자요 흰색은 종이 상태로 읽던 줄만 계속 읽게 되었고, 휴대폰도 들여다보고 싶지 않게 됐습니다. 부모님이 밥은 먹었느냐는 전화를 하루에 두 번씩 할 때가 되어서야 어딘가에 던져놓은 휴대폰을 집었습니다. 지금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네요.


나는 원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살다시피 했었는데 집에 온 후로는 음악도 듣지 않습니다. 매일 저녁 뉴스를 보는 것도, 요일별 드라마를 보는 것도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가끔 영화를 보긴 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틀어놓고 있었습니다. 큰 내용도 별 대사도 없는, 혼자 농사를 짓거나, 팥죽을 쑤거나, 노부부 둘이 농사를 짓는 그런 영화들을요.


왜, 속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해라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날이 갈수록 속이 시끄러워져 주변의 모든 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언짢은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직각의 날들로부터의 해방과는 별개로, 나의 내면은 아직 해방을 하지 못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는 위층의 벨소리, 발소리, 말소리, 노랫소리 같은 아주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지게 되어, 부모님이 모두 출근하고 나면 수험생 때도 안 썼던 이어 플러그를 꽂고 먹먹한 상태로 있기를 자처했습니다. 처음에는 내 들숨과 날숨 쌕쌕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것이 만족스러웠는데, 어쩌다 코가 막혀 펭펭, 삑삑거리는 소리가 들리니 그 소리까지도 거슬리는 순간이 왔습니다. 나는 코를 연신 풀고 다시 들숨과 날숨 소리에 거슬리는 것이 없는지 확인했습니다.


이러다가 편집증 같은 것이 생기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들지 않았다면 나는 정말 이상해졌을지도 모릅니다. 완벽의 상태를 갈망하면 집착을 하게 된다더니 며칠 못 가서는 없는 소리도 듣게 될 것 같아 이어 플러그를 빼버리고 마음을 쓸어내렸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생각하다가 영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일단, 위층 벨소리가 울리면 아저씨 전화받으세요, 발소리 뚜벅 소리가 나면 지금 퇴근하셨나 보네, 노랫소리에는 역시 아저씨 아직도 성가대 하시나 보네라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다른 쪽으로 미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건 꽤나 효과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에는 아침에 또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엄마는 이미 출근을 했는지 보이지 않았고 라디오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 집은 아침마다 라디오를 켰는데 이건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도 이미 진행되고 있던 우리 집의 아침 습관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라디오를 켜면서 아침을 알리는. 아침뿐만 아니라 청소를 할 때나, 저녁 식사를 할 때도 라디오를 켰습니다. 그래서 라디오 소리가 설거지의 물소리나 양치질의 칫솔질 소리, 세탁기의 툴툴대는 소리처럼 집 안의 소리 중 하나처럼 여겨졌습니다. 전혀 거슬릴 것 없이, 거의 관심을 주지 않는 소리였습니다. 하지만 며칠간의 병원 생활로 라디오 켜던 버릇을 잊은 건지 엄마는 집에 돌아와서도 라디오를 잘 켜지 않았는데 그래서 아주 오랜만의 라디오 소리였습니다.


나는 소음에 집착하는 마음이 원래의 나로 완전히 돌아가지는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여전히 사람들의 선명하고 카랑한 대화 소리가 듣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라디오를 끄기로 했는데, 라디오를 끄려면 라디오가 있는 거실까지 가야 하고, 비록 여기에서 거기 몇 발자국 되지도 않지만 가기가 귀찮아서 혼잣말로만, 꺼야지 꺼야지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라디오에서 피아노 곡이 흘러나왔습니다.

양손으로 건반 여러 개를 쾅하고 내리치고는 한참을 있더니 음을 하나씩 느리게 올리다가 빠르게, 그리고는 다시 음을 하나씩 느리게 내리다가 완전히 사그라들었습니다. 그러더니 점차 기대인지 설렘인지 모를 기분으로 붕붕 떠서는 한참을 오락가락하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바스러지는. 그런 곡이었습니다.


해석이니 곡 탄생 배경이니 하는 것은 전혀 모릅니다. 다만 나는 이렇게 음악에 허파가 일렁였던 것이 너무도 오랜만이라서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보통은 곡이 끝나면 곡명이 한 번 더 언급되기 때문에 나는 디제이의 이어지는 첫마디를 기다렸습니다. “쇼팽 발라드 1번 사단조 작품 번호 23번 피아니스트 권순훤의 연주로 듣고 오셨습니다.”


나는 그 이후 이어 나온 알비노니의 오보에 협주곡 D단조 작품번호 9-2와 바이올린 콘체르토 D장조 작품번호 61번까지 모두 듣고 이 세 곡을 플레이 리스트에 추가했습니다. 그날 이후 그 시간이 되면 라디오를 켰습니다. 이어폰도 다시 끼기 시작했고요.


부정이 나를 좀 먹을 때는 절대 부정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슬픔은 괜찮은데 부정은 안 됩니다. 출구와 반대로 가는 길을 구태여 선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속이 시끄러울 때는 고개를 떨구거나 손을 내젓거나 이불속으로 파고들지 마세요. 속삭이는 말도, 자장가도 듣기 싫겠지만 눈은 감고 귀는 열어, 그럼에도 어쩌다가 클래식을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듣기 싫다 하시면 클래식이 우연히 들릴 때 귀찮아서 끄지 말아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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