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하경 Jul 04. 2019

<기생충>. 어떤 디스토피아.

여기 서울의 반지하 공간에서 한 가족이 살아간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화목하게 살아가고 있으나, 절박하다는 부분은 변하지 않는다. 그 사실은 가족의 장남인 기우가 범죄를 통해 돈을 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이에 힘입어 가족 전체가 가담할 정도로 아찔하다. 그렇게 <기생충>은 가족 드라마의 위기에서 시작하여 범죄 스릴러의 서사로 나아간다.


이 이야기가 비극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물론, 그와 별개로 계획은 차질 없이 실행된다.  기우와 기정은 과외교사라는 점을 이용해 아무런 의심 없이 아이들을 고립시키고, 충숙은 가사도우미로서 대저택의 모든 곳을 돌아다닌다. 운전기사가 된 기택은 어떠한가.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연교와 박 사장은 언제든지 감금될 수 있을 것이다. 제목 그대로다. 기생충이 숙주에게 붙듯 반지하의 가족들은 저택의 가족에게 스며들어 이들의 삶을 좌지우지하기에 이른다. 완벽한 사기극. 그러나 이상한 점은 이 사기극이 지향하는 목표다. 그 누구도 재산의 강탈은 원하지 않으며, 결말 직전까지도 저택의 가족들은 어떤 불행도 겪지 않는다.


<기생충>은 난해한 영화가 아니다. 극 전체를 넘나드는 블랙 유머의 정서를 제때 따라간다면 계급에 관한 비유와 상징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실, 계급에 대한 이야기는 드물지 않게 있어왔다. 요컨대 <기생충>은 좋게 말해 친숙한 영화지만, 나쁘게 말해 뻔한 영화다. 하지만 <기생충>은 여전히 강렬하다.


<기생충>의 기반에는 서울이 있다. 서울은 그 자체로서 서사에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계급과 작은 사회가 공존하며 형성된 세계에 불과하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의 분리는 존재하지만, 계급의식에 의거한 폭력은 통용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 저택에 상주하는 부자와 빈자는 동등한 계약의 주체일 다름이다.    

그렇기에 <기생충>의 주제의식은 기존의 흐름과 확연한 구분을 보인다. <설국열차>를 포함하여 계급 문제가 존재하던 디스토피아 사회에는 분명한 사실이 있었다. 계급 간 차별이 서로의 존재는 인식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연장선에 불과한 저택 내부에서는 최소한의 인식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 


태풍이 지나가는 밤을 기점에서 계급의 문제는 선명해진다. 영화의 서스펜스는 전환을 이룬다. 치밀한 범죄 스릴러의 무대가 슬래셔의 참혹한 현장으로서 뒤틀리며 저택이라는 공간을 점유하기 위한 이들의 욕망은 폭력과 살인으로 귀결된다. 자본주의의 물질적 혜택으로 빚어진 저택은 그곳에 있는 모두가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위험한 공간으로 변화한다. 역설적인 것은 폭력마저 차등 적용이 된다는 사실이다. 저택에 상주하는 모든 이들은 창 밖에 내리는 비를 마주하며 타인에게 폭력성을 표출한다. 하지만 살인 가해자와 살인 피해자가 되는 것은 오직 빈자의 몫에 그칠 뿐이다. 저택의 가족들은 어쨌거나 일상 속의 환희를 마주한다.


 반지하의 가족들은 저택에서 탈출한다. 서울은 그들에게 빈곤이 밀집된 음울이 가득한 세상으로 드러난다. 물론 그것은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서울은 그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않았다. SUV의 뒤편에서 제시카가 바라보던 도심과 반지하의 창문에서 기정이 보는 골목 모두가 서울의 것이며 저택과 반지하에서 벌어진 각각의 비극 역시 동등한 층위의 사건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서울은 그 어떤 상상 속 사회보다 더욱 역설적이다. 예컨대 저택 내부의 계약관계에서 빈곤 계급의 정체성이 지워지고, 서울의 미세먼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위해 재난을 겪은 이들이 지워지듯, <기생충>은 계급 간 갈등과 착취는 없되, 빈곤 계급에게만 갈등과 착취가 존재하는 현실의 초현실주의적인 섬뜩함을 형상화하여 계급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기생충>의 계급 우화에는 논란이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계급 우월의식과 빈곤의 대상화다. 틀린 말은 아니다. 모두가 이기적이고 뒤틀려있지만  서사에서 드러난 모든 폭력과 기괴한 미장센의 근원은 빈곤에 있는 반면에, 모든 정상성은 중산층의 가족에게만 적용됐다. 이는 분명 타당한 시선이다.


그럼에도 나는 <기생충>의 계급 우화를 지지한다. 다시 말해, 나는 이러한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다. ‘모든 동물이 평등하지만 어떤 동물은 더욱 평등하다’는 <동물농장>의 글귀처럼, 중산층에게 부여된 정상성은 양극화의 불평등을 향한 우화의 일부분으로서 기능할 다름이다. 더욱이, 빈곤은 그 어디서도 디테일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소박함의 동의어로 전유됐을 뿐이다. 예컨대 빈곤계층의 청소년 문제는 학업성취율이 높은 극소수의 이들의 기특함에서 가려졌고,  노후화된 주거지에서의 생활문제는 기획 부동산 투기와 관광산업의 마케팅 과정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빈곤으로 인한 삶의 내몰림은 그 어디에서도 없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기생충>이 그려낸 빈곤의 풍경은 지워진 사실 직시하는 것에 가깝다.


반지하의 가족은 피자 박스를 접었다. 그들은 예능 프로그램의 대체재로 집 앞의 알코올 중독자를 선택했다. 폭력적이어야만 살 수 있던 이들에게 겹쳐지는 것은 <엘리트 스쿼드>의 시선으로 바라본 리우 데 자네이루의 파벨라에서  마약을 조달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주민들의 모습이었다. 물론, 서울은 세계적으로 안전한 도시다. 최소한 마약 조직의 심기를 건드린 누군가가 공개 처형당하는 일은 없는 곳이다. 그렇기에 한국사회의 빈곤은 특별한 기준에 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워져 왔다. <기생충>의 이야기 한계가 있음은 분명하다. 반지하의 가족들이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은 비극이지만, 서울 내부에 한정 세계관과 범죄 가해자의 시선에 무의식적으로 이입하게 되는 서사의 구조는 긍정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기생충>을 지지하게 되는 것은, 실재하는 착취의 문제 직시한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어벤저스 : 엔드게임>,<미성년> 단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