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로 남원을 가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 누구와도 약속이 되어있지 않은 혼자만의 휴가였기 때문에 마음이 내키는 대로, 친구들과 구례-하동을 돌아다니다가, 그냥 서울에 갈 수도 있고, 혹은 고창으로 바로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더더군다나 혼자 하는 여행은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어서 어딜 혼자 떠날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구례-하동을 여행하는 내내 비가 왔다. 타고 싶었던 짚라인도, 오르고 싶었던 지리산 노고단도 모두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덕분에 시원했고, 친구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어딘가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몰랐던 사실인데, 지리산을 끼고 많은 도시가 인접해있었다. 남원, 함양, 구례, 하동 등이 그랬고, 생각보다 고창이랑 가까웠다. 담양, 전주, 광주, 군산, 익산 등등 고창 인접도시들을 많이 다녀봤는데 왜 남원에 와볼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을까? 전라북도라서 단순히 내적 친밀감만 쌓아왔던 남원을 마지막 여행지로 삼기로 했다. 급히 한옥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고, 아는 곳은 광한루밖에 없었다.
전주 한옥마을과 익숙한 동네 분위기. 광한루를 중심으로 주변이 잘 정비되어있었다. 6시부터는 무료인데, 해지기 전에 들어가서 혼자 춘향이집 구경도 하고, 그네도 탔다. 그네 밀어줄 사람 한 명만 있으면 더 좋았겠다 싶지만 혼자라서 광한루에만 2시간이 넘게 죽치고 앉아있을 수 있었다.
밤이 되니 더 예쁜 광한루였다. 나름 모양성을 카페 드나들듯 하며 문화재를 자연스럽게 누리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내키면 광한루를 집 앞 산책하듯 드나들 수 있는 남원 사람들이 부러웠다. 이 좋은걸 여태 못 보고 살았나 싶게, 오버스럽게 감정이 끌어 오르는 시간이었다. 비가 온 뒤라 바람이 솔솔 불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이 좋은 감정을 혼자 삭히지는 못하고 여기저기에 메시지를 보냈다. 혼자인 게 좋으면서 또 혼자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
가장 잘 한 선택 중 하나는 광한루 후문에서 나와 강가를 따라 10분 걸으면 나오는 아늑한 한옥 게스트하우스였다. 정갈한 마당이나, 높은 천장이 매력적인 1인실까지 모두 쾌적했다. 예상치 못했던 건 나의 불안함이었다. 밤이 되고, 조용하고 낯선 도시에 혼자 있다고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호텔처럼 방이 아주 독립적으로 분리되어있는 것도 아니었고, 화장실도 공용이라 괜히 불안했다. 홀로 여행은 참 매력 있지만, 혼자라면 더더욱, 안정감 있는 숙소를 찾아야겠다.
광한루를 거닐 만큼 거닐고 숙소에 가는 길, 이 동네 사람들이 주로 산책/러닝을 하는 강변을 따라 걸었다. 알고 길을 나선건 아니었는데 이마저도 우연으로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춘향이의 고장답게 사랑가의 구절들이 곳곳에 적혀있었다. 초등학교 때 3년간 판소리를 배운건 나의 자랑이다. '사랑 사랑 사랑 내사랑이야~'와 같은 남들이 다 아는 구절이 아니라 제대로 배운 사람만 알 수 있는 그 구절을 부를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으쓱한 일이었다. 반가운 가사들을 길에서 만나 속으로 멜로디를 읊조리며 걸었다. 한때 명절이면 용돈벌이에 효자 노릇하던 사랑가, 그 외에도 심청이 엄마가 심청이를 낳는 대목, 쑥대머리까지 여전히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판소리는 나에게 즐겁고 친밀한 음악이다. 기회가 되면 더 부르고 더 배우고 싶을 만큼.
광한루만 생각하고 찾아간 남원에서 뜻밖의 보물을 발견했다. 관람객도 거의 없는 쾌적한 미술관에서, 안내된 설명을 꼼꼼히 읽으며 이해해보고, 천천히 그림을 누리는 시간을 가졌다. 텍스트가 아닌 것으로부터 대화하는 느낌을 받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생명력, 그리고 구원을 갈망하는 마음 등 근래 고민하던 것들과 맞물려 여러 생각을 했다. 특히 누군가 나고자란 아주 고유한 환경에 대한 생각이 더 확장된 시간이었는데, 정체성과 고유성에 대한 인정이 확고해지는 시간이었다.
성인이 되어서 고창을 혼자 오가면서 나의 유년시절을 반복해 재해석하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부분이 내 고향과 오버랩되었던 김애란의 ‘잊기 좋은 이름’을 읽으며 '나를 이룬 팔 할'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최근 초창기 작품인 달려라 아비까지, 김애란의 거의 모든 출판물을 읽으며, 그녀의 세계는 그녀가 주체적으로 만들어온 세계뿐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형성된 세계, 이를테면 고향이나 가족과 같이 선택한 적 없는 것들로부터 이루어졌고, 그것은 너무 고유하고 가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선을 나에게 돌려, 나를 이루고 있는 그 고유함을 정의 내려보려 노력했다.
남원에서 나고 자란 김병종님의 작품에는 지리산이 있고, 근처인 나의 고향 선운산도 있다. 잠깐이지만 하동에서 지리산을 만나고, 또 남원을 잠깐 거닐며 느꼈던 것들이 그림에도 많이 담겨있는 듯했다. 작가님은 알랑가 모르겠지만, 뿜어져 나오는 전라도 바이브에 친근함을 느꼈다. 고향은 진한 클리셰인 동시에 진한 고유함이라 생각했다.
10년째 서울에 살면서도, 어딘가 모자라고 선진적이진 않지만, 느리기는 또 무지하게 느리지만, 나를 키운 팔 할이 그 세련되지 않은 공간과 사람이라는 게 점점 더 강하게 느껴진다. 자랑스러울 정도로 멋지진 않아도 적어도 나만이 가진 그 고유성을 자랑하고 싶을 때가 있다.
카리브해 여행이 담긴 그림들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다음에는 쿠바에 가고 싶다고 생각이 들만큼, 강렬한 색채와 순수한 정열을 누려보고 싶었다. 어느 순간부턴가 매일 입기 좋은 무채색의 옷을 많이 사게 되었는데, 주변에 '색'을 많이 들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여유롭게 즐긴 미술관은 처음인데, 혼자가 아니면 못했을 것 같다. 홀로 여행 = 미술관 꼭 가야지. 메모.
여행의 마무리는 바로 옆에 붙어있는 '미안 카페'에서 화첩기행을 읽으며 여유롭게 해보려고 했는데, 고창에 가야 할 시간이 다가와서, 짧은 시간에 책에 몰입이 잘 안됐다. 아무튼 커피도 쿠키도 분위기도 베스트인 카페였다. 10월을 넘어 다른 전시가 열리면 날 좋을 때, 아직 보지 못한 천문대 보러 또 남원엘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