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정작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다. 단순하고 빠르게 남의 생각을 엿볼 목적으로 고른 에세이. 한 달 전부터 야금야금 읽어온 이 책을 오늘에나 마무리하고 다음에는 소설을 읽어봐야겠다는 작은 결심이 섰다.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입니다. ~했어요" 체의 에세이가 신선했다. 어딘가 엄청 재밌고 엄청 성실한 동네 아저씨가 길에서 만난 동네 꼬마한테 엄청 어려운 얘기를 되게 쉬운 척하면서 들려주는 느낌이랄까.
더 재미있었던건, 그동안 읽었던 어느 책들과 오버랩 되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같은 말도 두번들으니 마음에 콕 박혀 나도 모르게 갈피를 꽂았다.
자, 그런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그걸 분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답은 한 가지, 실제로 물에 뛰어들어 과연 떠오르는지 가라앉는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을 때는 일단 그 상황에 나를 집어넣어보는 것이 좋다. 가장 확실한 리트머스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용기는 그래서 필요하다" (태도에 관하여, 임경선)
얼마 전 임경선의 <태도에 관하여>를 읽으면서도 비슷한 내용에 밑줄을 그었다. 특정 시즌에 마음이 동해 모아둔 문장들을 한 데 두고 보면 웃길 때가 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비슷한 말들로 가득하다. 덕분에 거꾸로 나의 고민을 추정해볼 수가 있는데, 새로운 선택이 필요한 요즘은 막연히 걸어가는 발걸음에 용기가 필요했나 보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OO을 못해', '내가 저걸 할 수 있을까?'와 같은 나에 대한 편견을 발견하고 있다. 스스로 깨달아왔는지, 누군가 나를 규정하는 말들로 학습해온 건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생각보다 많이 다른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스스로 양육하고 있는 기분도 드는데, 나를 테스트하고 자문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건 안 해봤잖아, 그러니까 해봐', '이건 어떨 거 같아?' 묻고 살핀다. 이런 생각들은 하루키나 임경선님같이 나에게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어서 뛰어들어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조언 때문에 올해 들어 더 커졌다. 용기가 있으면 조금 더 재밌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실패의 타격감은 아직 익숙지 않아서 그것까지 재밌을진 모르겠다.
다시 곰곰 생각해보니 멋진 소설을 쓰지 못했어도 그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설을 썼는데 첫판부터 그렇게 술술 멋진 작품을 써낼 수 있을 리가 없지요.
용기 없고 게으른 게 좋은 핑계라면 핑계다. 해본 적이 없으니 실패할 일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 같은데, 다들 막연한 자신감 같은 게 있지 않나. '내가 안 해봐서 그렇지~'로 시작되는 무언가. 성인이 되어서 현실의 벽에 턱, 턱 부딪히며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지만, 특히나 어릴 땐 아직 해보지 않은 영역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 같은 게 있었다. 한편, 용기를 내지 않았던 이유 중에는 예상외로 되게 후질까봐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하고 싶었던 일을 쪼끔씩 벌리면서 보니까 진짜 후져서 실망스럽기도 하지만, 하루키 선생님이 또 이렇게 위로를 주신다.
동시에 하루키는 천재성보다 성실함에 방점을 찍는다. '날카로운 면도날'같은 재능과는 또 다른 영역의 '잘 갈린 도끼'를 가는 일을 강조한다. 40년이 넘도록 소설을 쓴다는건 천재성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닌게 맞다. 하루키는 매일의 규칙적인 일정 안에서 글을 쓴다. 장편소설은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 좀 더 쓰고 싶어도, 조금 잘 안된다 싶어도 거기까지 한다. <지적자본론>에서 의무에 따르는 삶이 자유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개인적으로 대가 같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해주는 게 좋다. 요행을 바라지 않고, 성실함의 법칙을 신뢰하고 따르는 일은 손해 볼 장사는 아닌 것 같다.
쓰고 싶다,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 라는 사람이 소설을 씁니다. 그리고 또한 지속적으로 소설을 씁니다.
김연수는 <청춘의 문장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게도 꿈이라는 게 몇 개 있다. 그중 하나는 마음을 잡아 끄는 그 절실함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 쓸데없다고 핀잔준다 해도 내 쓸모란 바로 거기에 있는 걸 어떡하나"
'이 소설가들 같으니라고!' 문장의 싱크를 맞추며 마음으로 작게 탄식했다. 절실한 사람들이 쓰는구나. 못 견디는 사람들은 결국에 하는구나. 그 동하는 마음이 한편으로 잘 상상되지는 않으면서도 부러웠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 돌아오게 되는 어떤 영역들이 있다. 'Born to be'가 그런 사람들을 위한 말일까? 자신의 쓸모가 거기에 있어서 어쩔 수가 없는 사람들. 소설가와는 거리가 먼 나지만, 그 못 견디는 마음이 너무 귀엽고 멋있다.
하루키 소설을 잘 모르고, 소설가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라 관심이 없어지는 파트도 있었지만, 창작의 영역에 있는 사람이라면 좋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책 같다. 성실함과 신체력의 중요성, 그리고 무언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등 문장 주워먹는 재미가 쏠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