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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넛버터 Dec 09. 2022

일에서 존재 이유를 찾는 사람들

유능하거나, 사랑스럽거나


최근 방영한 드라마 '작은아씨들'을 보면서 '사랑받는 것'과 '능력을 인정받는 것'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극중 막내는 언니들의 헌신적인 사랑을 당연하게 받으며 자랐지만, 내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사랑은 가치 없다고 느낀다. 내 성취로 얻어낸 게 아니니까.


부잣집 친구는 '나라면 엄청 고마워할 것 같은데, 넌 당연하게 받아들이더라'라며 내심 부러워하지만, 막내는 '받는 사람이 사랑을 거부할 권리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라며 언니들에게 냉소적이다.


오히려 막내의 천재적인 그림 재능을 알아봐주고 계산적으로 후원해주는 친구 집안이 막내가 받고 싶어하는 적절한 사랑이다. 하지만 그건 사랑이라기보다는 대가성 거래에 가깝다.



제 생각에 직업이란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 즉 말 그대로 무엇을 위해 하루하루를 사는지 하는 정체성에 가깝다고 봅니다. (...)

내 이름 석 자가 새겨진 결과물에 대한 책임감의 무게였다. 그 책임감은 한편으로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자긍심을 지탱해주는 기반이기도 했다. 보통의 회사원으로 일하면서는 홀가분함을 누리는 만큼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인정(credit)이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최근 읽은 책 <잡스: 에디터>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나오는데, 저자는 직업을 통해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과 내 삶의 존재이유를 얻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직 후 평범한 월급쟁이의 역할을 기대하는 대기업에 소속되는 순간, 저자는 워라밸을 얻는 대신 스스로의 자존감을 직업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작은아씨들’의 막내와 ‘에디터’의 저자에 공감하는 이유는, 내가 내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능력, 즉 내가 세상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에서 찾는 사람이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나같은 사람이 소수라는 건 여러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능력보다는 관계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영화에서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이 사람은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에요"라는 말보다 "이 사람은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이에요"라는 말이 훨씬 자연스러운 것처럼.

결국 사람은 태어난 이상 내가 존재한 이유를 어떤 식으로든 확인해야 최소한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근거는 '나의 능력'이 될 수도 있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둘은 굉장히 별개의 가치이다.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양쪽 모두를 추구하지만, 둘 사이 우선순위는 필요하다. 사람의 시간과 에너지는 유한하기에, 능력과 관계에 모두 100% 집중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유능하거나, 사랑스럽거나 하는 문제.

어릴 때야 선천적인 재능으로 둘 모두를 가질 수 있다고 믿었지만, 아무리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어도 지속적으로 유능하려면 많은 노력과 Try & lesson learned의 과정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연예인처럼 뛰어난 외모를 타고났어도 내가 원하는 단단한 사랑을 받으려면 사람을 보는 눈, 그리고 그 사람에게 꾸준하고 지속적으로 관심과 애정을 쏟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 시시한 집단에서 능력으로 추대되거나 사랑받는 경험은 슬프게도 그다지 자존감에 기여하지 않는다.

결론은 지속적으로 건강한 자존감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피곤하더라도 매사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조직에 도움이 되는 유능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거나,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매력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거나. 나 자신의 쓸모이든, 매력이든, 성인이 된 이후 우리는 언제나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인생은 고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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