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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피 Oct 22. 2023

하얀 거인이 굽어보는 도시

푸에블라의 촐룰라에서

화산과 피라미드의 도시, 촐룰라


촐룰라는 푸에블라 주의 마법의 도시다. 푸에블라 주에는 어떤 마법의 도시가 있는지 찾아보던 차에 단 한 장의 사진에 단번에 매료되었다. 하얗게 눈이 내린 거대한 화산을 배경으로 나지막한 언덕 위에 고고하게 서 있는 노란빛 성당이 대조적으로 눈에 띄는 사진이었다.


포포카테페틀(Popocatépetl) 화산과 치유의 성당 @https://www.flickr.com/photos/comefilm/24340074185


그렇게 우리는 당연한 듯 촐룰라행을 결정했고, 10월을 맞아 멕시코의 꽃, 셈파수칠이 만개한 들판 위에 솟은 피라미드를 보기 위해 촐룰라로 향하게 되었다. 촐룰라는 화산과 피라미드의 도시이자, '셈파수칠(Cempasúchil)'의 도시이기도 했다.


멕시코를 상징하는 꽃, 셈파수칠


10월은 멕시코에서 아주 중요한 달이다. 멕시칸들이 가장 사랑하는 문화이자 유구한 전통인 망자의 날, '디아 데 무에르또스(Día de muertos)'가 있는 달이기 때문이다. 생소할 수밖에 없는 먼 나라 멕시코의 문화이지만, 한국에도 잘 알려진 디즈니 애니메이션 코코의 배경이 바로 이 '망자의 날'이다.


코코와 사방에 깔린 셈파수칠 @Disney


'망자의 날' 하면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오렌지 빛 '셈파수칠(Cempasúchil)' 꽃이다. 이름부터 무척 이국적인 이 꽃은 국화과의 꽃으로 멕시코에서는 삶과 죽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망자의 날이 다가오면 멕시코 사람들은 조상의 무덤과 제단을 이 꽃으로 장식하여 망자의 영혼이 잘 찾아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색채가 짙고 강렬한 오렌지 빛 셈파수칠은 10월이면 만개한다. 너른 들판이 오렌지 빛으로 물들면 망자의 날을 위해 수확되어 멕시코 전역으로 뿌려진다. (그리고 바로 촐룰라가 속한 푸에블라 주가 셈파수칠의 가장 큰 생산지이다.) 그래서 10월엔 오렌지 빛 꽃을 하늘높이 쌓아 올린 트럭이 도로 위를 지나다니는 걸 종종 볼 수 있다.


망자의 날을 맞아 멕시코 카트리나가 되어보자!


셈파수칠 꽃밭을 방문하기 전 특별히 해골 분장을 받아보기로 했다. 우연히 길을 지나다 가게 유리창에 붙어 있는 해골 분장 전단지를 보고 충동적으로 예약을 해 버린 뒤였다. 하지만 막상 샵에 들어서니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괜스레 쭈뼛대며 자리에 앉자 젊은 여성이 다가왔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아침에 대충 찾아둔 사진 몇 장을 보여 주며 말했다.


"음... 여기, 이 사진처럼 반짝이도 붙였으면 좋겠고... 문양은 너무 화려하지 않게... 이 사진 정도로요. 그리고 색깔은..... 흠, 이 사진 색감처럼 해주세요!"


뒤죽박죽 요청에도 오늘 내 얼굴을 담당할 직원은 망설임 없이 팔레트를 골라 꺼내 들더니 내 얼굴을 도화지 삼아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눈을 감자 차갑고 촉촉한 붓의 촉감이 느껴졌다. 핀셋으로 눈 주변에 동그랗게 반짝이를 붙이고 색깔은 셈파수칠과 같은 오렌지 색으로.


메이크업을 받는 동안 거울을 볼 수 없어 불안했지만 결과물은 꽤 만족스러웠다. 메이크업에 한 시간이 넘게 걸렸는데 비용은 고작 100페소. 한국 돈으로 7,000원 정도 되는 돈이다. 기쁜 마음으로 돈을 지불하려 하자 그녀가 잠시 막아서더니 영문을 몰라 눈을 둥그렇게 뜬 나의 목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아, 목까지 칠해 준다는 거구나.'


그녀는 물 묻힌 스펀지를 꺼내 들더니 원피스를 입어 훤히 드러난 목에다 스펀지를 통통 찍어 마무리해 주었다. 곧이어 나는 한 마리의(?) 기분 좋은 카트리나(여성 해골을 일컫는 말) 되어 샵을 나섰다. 


심장에 물을 주고 있는 카트리나 @숲피


오렌지 빛 꽃밭에서 만난 사람들


피라미드를 배경으로 한 넓은 꽃밭 근처에 도착하니 이미 주차된 차들도, 사람들도 많았다. 시즌을 맞은 유명 관광지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그리고 곧 꽃밭에 들어서자 해골 분장에 코스튬까지 제대로 갖춰 입은 사람들이 전문 사진가를 고용하여 반사판까지 동원해 사진을 찍는 진귀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입이 떡 벌어지는 분장과 복장, 소품까지... 전문적 장비까지 동원해 모델처럼 능숙하게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얼마쯤 구경하고 서있었을까. 문득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져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힐끔대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다. 전문 모델보다 더 희귀한 나는 바로 동양에서 온 카트리나였던 것이다. 


쉽게 볼 수 없는 동양인이 해골 분장까지 하고 있다 보니 자연스레 받게 된 관심이었다. 심지어 나는 멕시코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다. 나에게 와닿는 수많은 시선들을 애써 무시하며 나도 기념사진을 남기기 위해 꽃밭에 들어갔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사진을 몇 장 찍고 있으니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올라- 부에나스 따르데스."


"올라! 부에나스 따르데스."


"어디에서 왔어?"


"한국에서 왔어."


'꼬레아'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얼굴에 반가워하는 기색이 스쳤다. 


"그렇구나. 한국인이 이렇게 분장한 건 처음 봐. 물론 한국인도 처음 보지만. (하하) 원하면 이 꽃다발 들고 사진 찍을래?"


그가 들고 있던 커다란 셈파수칠 꽃다발을 내밀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소품용으로 직접 엮어 만든 듯싶었다. 


"우와, 나한테 빌려 줘도 되는 거야? 고마워!"


기쁜 마음으로 그의 호의를 받아 들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머뭇대며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용기를 얻어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머리띠를, 누군가는 꽃을 예쁘게 달아 놓은 모자를 빌려 주기도 했다. 쏟아지는 관심에 당황스러움도 잠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호의를 동시에 받아본 적이 언제인가 생각하니 고마운 마음이 앞섰다. 그리고 거기 있던 사람들과 신나게 떠들며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생각하며 빌려줬던 꽃다발을 돌려주려 하자 그가 나에게 다시 꽃다발을 건네며 말했다.


"이 꽃은 선물이야. 멕시코에서 좋은 기억만 안고 돌아갔으면 좋겠다."



드디어 드러난 하얀 거인의 검은 실루엣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어느새 넓은 들판에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드니 지는 해를 뒤로 하고 그제야 모습을 드러낸 거인의 실루엣. 정말 그 자리에 있었구나. 못 보고 가는 줄 알았는데. 비현실적으로 거대한 화산의 실루엣이 빛나고 있었다.


타들어갈 듯 붉었던 하늘이 점차 오렌지 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고, 끝없이 펼쳐진 하늘 아래 눈 덮인 화산은 그 존재감을 조용히 드리우고 있었다. 모든 사물이 검은 그림자가 되어 바람에 너울거린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삽시간에 사위가 어두워졌다.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포포카테페틀 화산의 실루엣 @숲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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