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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 Jung Dec 18. 2019

얼렁뚱땅 산티아고 순례길 13

배낭의 무게는 욕심의 무게

스물두번째날.





독일 친구들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깼다. 하긴 여기서는 매일 에너지를 최대한 짜내서 보내다 보니 언제나 깊은 잠이긴 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일찍 출발이다.


신기하게 매일매일 일찍 출발해야 하는 이유가 생긴다. 성격 탓이다. 오늘은 비록 배낭을 처음으로 메지 않지만 다리 상태가 어떨지 모르니 일찍 출발이다. 행여 중간에 아예 걷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눈 뜨자마자 다리의 상태를 살폈다. 어제보다는 살짝 좋아진 것 같지만 걸어봐야 알 것 같다. 여전히 다리는 아팠다. 특히 어떨 때는 소리도 못 낼 만큼 아프기도 했다. 20일이 지나고서 처음으로 배낭 꾸리는 루틴이 바뀌었다. 오늘은 작은 가방을 별도로 꾸려야 했다.


본 배낭은 동키서비스(배낭을 배송해주는 서비스 이름이다. 아마도 예전엔 당나귀가 순례자들의 짐을 날라주어서 유래된 것 같다.)를 이용하고, 만약을 위해 꼭 필요한 것들로 작은 가방을 꾸렸다.


배낭 배송을 위한 비용을 작은 봉투에 넣어 배낭에 걸고 알베르게의 리셉션으로 가져갔다. 걱정 걱정, 불안불안 열매를 많이 먹는 내 마음을 안정시켜 줄, 나와 같은 봉투를 매단 배낭이 몇 개 보인다. 일단은 혹시 분실되더라도 함께 할 동지가 있다는데 안심이 된다. (배송 서비스도 독점이 아니고 경쟁이다. 봉투를 보고 회사를 구분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배낭 없이 걸어보니 확실히 편했다. 배낭 없이 걷는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아서인지 약간 순례길을 걷는 게 아닌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냥 어딘가 산책 온 것 같은 느낌. 이래서 배낭의 무게가 중요한 것이구나 하는 진리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었다. 다만 다리가 멀쩡하지 못하니 이런 산책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배낭 없이 걸으며 그 와중에 몇 가지 테스트들을 해보았다. 왜 아픈지야 무리를 했으니 뻔한 것이었고, 어떤 상황이나 각도에서 고통이 증가하거나 감소하는지에 대한 나름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 확실히 특정 각도에서는 온몸에 전기가 흐르며 최고의 통증을 선사했다.


나름 추출된 데이터를 근거로 최대한 고통이 덜한 발놀림으로 걷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사람의 집중력은 한계가 있어서 가끔 무의식적으로 내딛는 자세가 불러온 통증은, 그 시점에서 순간 이동으로 오늘의 목적지, 아니 산티아고, 아니 그냥 집으로 가버렸으면 하는 생각까지 불러왔다. 물론 그러고는 잠시 후에 '걸을만하네' 하고 절뚝거리며 걷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이런저런 고민과 실험들을 하다 보니 다행히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동안 머물렀던 어떤 마을보다 작은 곳이다. 평소 같으면 이런 마을에 잘 안 머무르는데, 아픈 다리로 얼마나 걸을 수 있을지 몰라 짧은 거리인 24km를 선택했다.


알베르게는 마을의 아주 작은 성당과 함께 있었고 자원봉사자들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숙박자 명단을 작성하려는데 한편에 반가운 모습이 보인다. 아침에 이별했던 내 배낭이다. 사람들과 말을 많이 섞지 않고 혼자 다니던 외로움에 색다른(?) 반가움이었다.


색다른 반가움은 오후 늦게 한 번 더 있었다. 전날 같은 방에 있었던 똑같은 이름을 쓰는 독일의 동네 친구 두 명도 이곳에 초주검이 되어서 왔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24km 걸은 모습이 아니었다. 아무튼 서로 반갑게 인사했다.


정말 할 것 없는 마을이지만 다행히 작은 마트가 있어 음식을 몇 개 사서 비축하고 콜라로 에너지를 충전했다. 하루를 배낭 없이 걸어보니 다행히 다리가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이제 거리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일단 당분간은 배낭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아직 다리 상태를 확신할 수 없으니 당연히 또 일찍 출발해야 할 것 같다. 3분 빠에야를 레인지에 돌려 아주 이른 저녁을 먹고 어김없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스물세번째날.




순례길을 시작한 이후로 그동안 관계를 많이 만들지 않았다. 숙소에나 길 위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관계가 적으니 그만큼 문제나 스트레스도 적었다. 20일이 넘는 긴 기간을 걷고 걸으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 올렸던 많은 생각들이 가끔 마음의 '화'를 만들어 내곤 했지만, 그것들은 다 지나간 것이었다.


그만큼 그동안 자꾸 떠올리며 생각의 희석을 통해 묽어진 화였다. 물론 그중에는 더 커진 것도 간혹 있긴 하지만 그래도 경험해 본 '화' 이기에 견딜만했다.



그런데 오늘 스물세 번째 날 만에 처음으로 새로운 '화'가 만들어졌다.



배낭 배송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전날 업체에 예약을 해야 한다. 그냥 봉투에 돈 넣고 배낭에 묶어 놓는다고 무조건 가져가는 게 아니다. 숙소도 워낙 많고 마을도 워낙 많으니 어느 곳에 배낭이 있는지를 미리 파악하고 가져가는 것이다. 그래서 전날 예약을 해야 한다.


물론 사설 알베르게는 주인이 당일 아침에 연락해서 가져가는 곳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전날 예약을 한다. 그런데 어제 내가 있던 알베르게는 자원봉사자들로 운영되는 곳이기에 밤에 예약을 하려고 했다.


장소 설명이 필요할지 몰라 이왕이면 말이 잘 통하는 스페인어로 예약을 하면 좋을 것 같아 자원봉사자 할아버지에게 요청을 했다. 그러자 지금 안 해도 되고 내일 아침에 하면 된다고 걱정 말라고 했다.


'일찍 출발해야 하는데 그 시간에 연락이 될까?'라는 생각이 들며 마음속으로는 불안했지만 이곳에서 그 말을 믿고 일단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6시 조금 넘어 일어나서 큰 배낭과 작은 배낭을 꾸리고 할아버지를 찾았다.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식당 테이블에 앉아 잡담을 하고 있었다. 내 전화를 주며 부탁을 했다. 갑자기 처음 듣는 표정으로 왜 본인에게 요청하느냐고 묻는다.



'어제저녁에 오늘 아침에 연락해 준다고...'

'내가 언제? 직접 해요'

'스페인어가 안돼서요'



그러자 '나도 스페인어가 안돼요!!!!'라고 무슨 대단한 유머를 한 듯 테이블의 다른 사람들과 웃음을 터뜨린다. 순간 '화'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거의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그래봤자 이미 늦었다. 어제 불안했을 때 어떻게든 시도해 봤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업체는 그 시간에 전화를 받지 않았다. 며칠만 배낭 없이 걸으면 좋아질 것 같은 다리였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다. 일단은 작은 가방을 다시 배낭 안에 넣었다. 하필 오늘은 또 고개를 넘어야 한다.


다행히 고개를 넘으면서도 다리가 더 악화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며칠 요령이 생겼다고 절뚝거리면서도 나름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더 다행인 건 아침의 사건을 계속 상기하며 속으로 하도 욕을 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발목에 신경이 덜 쓰였다.


그렇게 배낭을 메고도 26km를 걸어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배낭 배송 서비스를 예약했고 내일 묶을 숙소를 예약했다. 내일은 거리는 얼마 안 되지만 다리 상태도 있고 몸보신도 할 겸 대도시에서 묶기로 해서 예약을 부탁했다. 이곳의 주인은 내 전화를 주며 요청했는데 괜찮다며 본인의 전화로 해주었다.


덕분에 아침의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



순례길의 마지막 지방인 갈리시아로 들어왔다. 이제 160km만 남았다.








왠지 으스스한 마을도 지난다.




침대에 누워 바라본 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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