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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 Jung Dec 19. 2019

얼렁뚱땅 산티아고 순례길 14

예수님은 Sarria에서 출발하지 않으셨다.

스물네번째날.






배낭을 맡기고 숙소까지 예약해 놓아서 마음이 홀가분하다. 비록 발목의 상태가 다시 안 좋아지긴 했지만 당분간은 배낭 없이 걸을 예정이니 좋아질 거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오늘의 목적지는 산티아고 도착 전 마지막 큰 도시인 사리아(Sarria)이다.


사리아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도 꽤 중요한 도시이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출발지 중 가장 짧은 길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순례길을 걷는 이유가 꼭 종교적인 이유만 있는 건 아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이 길을 걷는다. 그 다른 이유만큼 출발지도 다르다. 모두 다 처음부터 끝까지 걷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만 그들이 가지는 공통점은 물리적인 목적지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길의 끝에는 그 성공을 인정해주는 일종의 증명서 같은 것을 순례자 사무국에서 만들어 준다. 그 조건은 최소 100km 이상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마지막 인증이 가능한 도시가 나의 오늘 목적지인 '사리아'이다.



20일이 넘는 동안 다행히 날씨 복이 있어서 비를 맞고 걷지 않았다. 발품 팔아 구해온 부피를 차지하는 비옷을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비가 아주 안 온건 아니지만 항상 마을에 도착한 이후에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필 이제 다 끝나가는데, 배낭을 보냈는데 걷는 도중 비가 온다. 아주 쏟아지는 비는 아니라서 방수되는 겉옷과 모자를 둘러쓰고 걷는다. 그래도 몸이 가벼우니 비가 와도 마음이 편하다.


정보에 의하면 사리아까지 24km로 되어 있지만 중간에 갈림길이 있다. 지름길로 가면 20km가 채 안 된다. 완전 헐렁한 하루다. 발목의 통증을 피하는 요령도 점점 생겨난다. 워낙 짧은 거리라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앱을 보고 선택한 숙소는 약간 언덕에 있었다. 도착해서 정하는 숙소와 달리 평면 지도만 가지고 예약한 숙소의 단점이다. 그래도 체력이 남아 있어서 개의치 않다. 너무 일찍 도착했는지 배낭은 아직 안 왔다.



1등으로 온 줄 알았는데 저 끝 침대에 누군가 누워있다. 비록 다리가 아프지만 오늘은 가장 짧은 거리를 걸었기 때문에 나보다 빨리 올 수 있나 하고 잠시 생각했다. 어디서 출발했냐고 물으니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왔다고 한다. 내일부터 걸어볼까 한다는데 아무리 봐도 길을 제대로 걸으려는 모양새는 아닌 것 같다.



잠시 후 젊은 친구 두 명이 들어왔다. 미국에서 온 19살, 20살의 풋풋한 사촌 형제들이다. 한 명은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있고, 한 명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아직 무엇을 할지 안 정했다고 한다. 젊은이들은 어디나 다들 비슷하다.


이어폰을 꼈는데도 메탈 음악이 밖으로 다 새어 나올 정도로 크게 음악을 듣고, 게임 이야기를 한다. 이 힘든 순례길에서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에너지가 넘친다. 한 시간여를 기다려 배낭을 받았다. 샤워를 하고 동네 구경을 나섰다.


도시는 큰데 길 위에 사람이 너무 없다. 빠에야 집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그 옆의 케밥집으로 들어갔다. 혼자 먹기에는 빠에야가 너무 양이 많아 보였다.














스물다섯번째날.





고지가 머지않았다. 오늘 드디어 마지막 100km 지점을 통과한다. 그 의미는 아주 짧게 걸어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마지막에는 배낭을 메야 하기에 몸을 좀 더 추슬러야 한다. 오늘의 걷는 목표는 22km이다. 이틀 연속 아주 짧은 거리를 걷는다.


오늘 상황을 보고 거리를 조금 늘릴 계획이다. 갈리시아 지방에 들어오니 길에서 만나는 숲들이 제대로다. 나무들도 거대하고 온통 푸르름이다. 목적지가 짧고 배낭도 없으니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 비록 작은 마을이지만 간격도 짧아서 더더욱 걷는데 무리가 없다.





순례길 위에는 계속해서 다양한 길 안내 표지판과 표지석이 존재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낙서를 해 놓았다. 오늘 그중에서 가장 재밌는 낙서를 발견했다.


'Jesus didn't start in Sarria'


짧게 걷는 사람들을 누군가 비꼬아 놓은 낙서이다. 저마다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길 위에 있는데 거리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이 낙서에는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이곳부터 출발하면 3-4일이면 걸을 수 있기에 꽤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길 위에 보인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좀 더 소란스럽고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상황이 더 많이 발생한다. 거기에 숙소나 식당에서 조금 불편해지니까 나름의 불만을 저렇게 재밌는 낙서로 해소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오늘의 목적지인 포르토마린(Portomarin)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의 꽤 기다란 다리를 건너면 경사가 높은 계단이 순례객들을 반긴다. 반갑지 않다. '굳이 이렇게 가파른 계단을 만들어야만 했냐?' 하고 소리치고 싶지만 참는다. 부상자들에겐 계단은 최악이다.


절뚝이며 간신히 계단을 올라 마을에 들어선다. 마을 자체도 경사진 언덕에 만들어져 있어 움직이는 게 힘들다. 많이 움직이지 않으려고 어젯밤에 지도를 보고 선택한 입구 근처에 숙소를 찾았다. 다행히 꽤 깔끔한 숙소였고 배낭도 무사히 도착해 있었다. 침대를 배정받고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어제 만났던 미국의 젊은 사촌 형제도 이곳으로 왔다.


마트를 찾아 중국 라면과 계란을 샀다. 면은 중국 라면, 스프는 우리 라면 스프를 이용해 라면을 끓였다. 거기에 순례길에서 발견한 스페인식 햇반을 넣어 라면죽을 끓였다. 식당에 미국 친구들이 있어서 조금씩 덜어 주었다. 맛있다고 하는데 약간 매운 눈치다. 다음에는 오지랖을 부리지 않아야겠다 생각했다.


이제 정말 며칠 안 남았는데 발목은 큰 차도가 없다. 긴긴 오후, 침대에 누워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는 무색무취의 스페인 연고로 셀프 마사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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