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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 Jung Dec 20. 2019

얼렁뚱땅 산티아고 순례길 15

혹시 다시 올지 모르니까.

스물여섯번째날.





이틀 연속 배낭을 보내고 짧은 거리를 걸었더니 발목이 조금 좋아졌다. 그래도 통증을 유발하는 특정 자세나 상황에 처하면 비명도 지르지 못할 만큼의 통증이 찾아온다. 그런 상황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한동안 정신을 바싹 차리고 신경을 써서 통증 없이 걷다 보면 마치 내 발이 정상이라고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꼭 한 번씩 2만 볼트 급의 충격을 동반한 통증이 찾아온다. 이럴 땐 정신줄을 최대한 오래 잡고 있도록 노력하면 된다. 내 부주의가 불러온 '벌'이라 생각하기에 너무 쓰지만 '달게' 받는다.



하지만 가끔은 정신을 차리고 있는데도 찾아오는 통증이 있다. 이런 일은 장애물을 만났을 때 발생한다. 눈이 장애물의 높이를 측정해서 뇌에게 전달한다. 뇌는 다리에게 장애물을 건널 수 있도록 얼마큼의 에너지를 이용해 얼마큼 다리를 높이 들라고 명령한다.



다리는 명령을 받아 다리를 든다. 그런데 다리가 장애물에 걸린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높이의 오류이거나 타이밍의 오류다. 일시적인 문제라면 특정 오류만 주로 발생할 텐데 지금은 두 가지 다 발생한다.



신체의 연식이 오래되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돌리기에는 발목이 아프고 난 후부터 자주 발생한다. 예방법은 별거 없다. 더 정신을 바싹 차리고, 장애물을 과장해서 측정하는 수밖에....



10cm 높이의 장애물을 만나면 '전방에 20cm 장애물 발견!!!'



(이런 쓸데(?) 없는 고민과 생각들을 자주 하는 이유는 갈 길은 멀고, 시간은 많기 때문입니다. 내 머리가 생각의 꼬리를 얼마나 물고 늘어질 수 있는지, 어느 단계까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궁금하면 이 길을 걸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오늘의 목적지는 25km 떨어진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라는 마을이다. 20km 언저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숙소도 많고 식당도 많고 마트도 여러개인 곳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묵을 것 같다.



사실 5km만 더 걸으면 나오는 카사노바(Casanova)라는 마을까지 가고 싶었다. 이름이 너무 끌어당겼지만 워낙 작은 마을이어서 알베르게도 2개뿐이고 거기까지 걸어갈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기에 안전하게 큰 마을로 정했다.



배낭은 마을의 가장 큰 숙소로 보내려고 했는데 관리인이 딱 정해진 시간만 있어서 그 앞의 카페로 보냈다. 도착하니 확실히 제법 큰 마을인 게 느껴졌다. 빨리 도착해서 공립 알베르게는 아직 열지 않았다. 카페에서 콜라 하나를 마시고 배낭을 찾아 나왔다. 사람들이 공립 알베르게 앞에 배낭을 줄 세우기 시작한다. (아직 오픈 전의 숙소에는 도착한 순서로 배낭을 나열한다. 침대 수가 정해져 있어서 나름의 대기표가 되는 것이다.)



줄 서기 싫어하고 공립의 대형 숙소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 나는 다른 숙소를 찾아 나섰다. 핸드폰 앱의 지도를 보고 근처의 나름 맘에 드는 곳을 가보니 다 자리가 없다고 한다. 조금 떨어진 숙소들까지 찾아가 보기에는 귀차니즘이 발동하여 다시 출발지로 돌아왔다. 내키지 않지만 슬그머니 배낭을 공립 알베르게 앞에 줄 세웠다.



오픈 시간이 되자 관리인이 출근했다. 배낭의 순서대로 입장해서 침대를 배정받는다. 순례길의 막바지가 되니 사람들도 많고 특히 그동안 못 봤던 한국인들도 많이 보인다. 선착순의 상위권에 한국 사람들이 많아서 대부분 같은 방을 배정받았다.



관리인은 나이가 제법 들어 보이는 여자였다. 그녀는 순례객이 많아서인지, 한국인이 많아서인지 (아무래도 후자 같지만) 아무튼 얼굴에서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특히 자신의 스페인어를 못 알아듣는 거에 더 짜증이 난듯했다.



사람들의 영어를 알아듣는 걸로 봐서는 영어도 할 수 있는 것 같은데 오로지 스페인어로만 설명을 했다. 내 앞의 한국인 어르신들이 자꾸 이곳에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요구해서 더 짜증이 난듯했다. 앞의 전례를 보아 내 순서가 되어 고분고분 그냥 체크인을 하려 했다.



그런 내 맘도 모르고 일찍 왔는데도 나에게 2층 침대를 배정해 주었다. 그래서 살짝 그녀의 짜증을 추가해 주며 1층으로 바꿔 달라고 했다.



'앞에 한국 사람들이랑 일행 아니야?'

'아니야. 나 혼자 왔어'

(어느 숙소든 보통 일행에게는 한 침대의 아래, 위를 배정한다.)



같은 방을 배정받은 한국 분들과 인사를 나눴다. 대부분 나이가 있으신 분들이었는데 이미 이곳의 불친절함을 알고 계셨다. 사전에 공부들을 많이 해 오신 것 같았다. 한 부부는 배낭에서 양은 냄비를 비롯한 각종 조리도구를 챙기더니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에 다 있는데 왜 챙기냐 물으니 여기 숙소는 그런 게 없는 곳이라고 했다. 정말 가보니 가스 불만 있고 숟가락조차 없는 곳이었다. 그 부부는 와중에 고기를 구워서 쌈을 싸서 먹고 있었다. 안 그래도 3분 빠에야 데워 먹으려고 했는데 식당도 차지하고 있고 숟가락도 없어 다시 배낭에 넣고 그냥 식당 가서 먹기로 했다



 옆 침대의 한 아주머니는 마트에 가는데 위치 좀 찾아봐 달라고 했다. 지도 앱을 실행해 가장 가까운 마트를 찾으니 거기 말고 특정 브랜드의 마트를 찾아 달라고 했다. 그곳의 물건이 싸다고 했다.



혼자 다니는데 큰 불편은 없었지만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니 얻게 되는 정보가 많았다. 물론 이제 다 끝났지만 귀담아들었다.



호.. 호.. 혹시 다시 올지 모르니까........















침대에 누우니 보인 누군가가 써 놓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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