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과이
2004년 8월
머피의 법칙처럼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좋아하는 영화를 발견하면 꼭 좋아하는 장면이 지난 다음이고, 라디오든 길거리든 무슨 노래인지 모르지만 맘에 드는 노래를 듣게 되면 꼭 중간부터 듣게돼어 제목을 모르게 된다는...(그때는 지금처럼 스마트폰 앱만 켜면 무슨 노래든 다 찾아주는 시대가 아니었다는...)
당시 우연히 자주 듣게 돼서 관심 가는 노래가 있었는데 결국 찾고 보니 '하림'의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라는 곡이었다. 그러면서 노래 제목처럼 과거의 사랑이 정말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는 걸까에 대한 생각을 블로그에 끄적거렸었다.
지금의 하림은 TV에도 많이 나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알지만, 당시에는 1집의 '출국'이라는 곡이 매니아들에게 뒤늦게 인기를 끌었을 뿐 방송활동도 거의 하지 않고 해서 사실 유명하지 않은 가수였다. (지금 노래 '출국'을 찾아보면 작사가 윤종신으로 나오지만 당시에는 가명으로 되어 있었다.)
노래 '출국'이 인기를 끌 때 플레이어에 항상 넣어 다닐 만큼 좋아했지만 사실 그의 다른 노래들에까지는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그 후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를 듣고서 하림의 노래란 걸 알게 된 후 그의 1집과 2집을 다 구매했고, 그 이후에 내가 가졌던 모든 음악 플레이어에는 이때의 그의 노래가 항상 존재해 왔다.
이 노래도 사실 당시에도 대중적으로 히트한 노래는 아니었고 윤종신, 조정치와 함께 신치림으로 방송에 나오고 또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리게 된 근래에 와서야 다시 재조명되어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 노래이다.
심지어 앨범에 전체 13곡중 12번째 트랙이었다.
2008년 10월.
2008년 회사를 퇴사하고 떠난 첫 장기 홀로 여행은 사실 구체적인 일정이나 경로를 정하지 않았던 무대책 여행이었다.
그전에 몇 번 경험한 여행이라고 해봐야 다 준비되어 있는데 따라다닌 게 전부였어서 낯선 혼자만의 여행이 사실 무서웠었다.
다행히 호주에 살고 있던 친한 후배 덕분에 그곳에 장기간 머물며 외국의 분위기와 여행의 분위기를 익힐 수 있었다.
호기롭게 떠나오긴 했지만 결국 친한 지인 옆에서 낯설지 않은 생활이 조금 길어지다 보니 안되겠다 싶어서 뉴질랜드도 여행하고 호주의 다른 곳들을 여행하고 떠날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 중 호주 중앙을 아래에서 위로 관통하는 과정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호주 중앙 남부 '애들레이드'에서 현지 투어에 조인해서 중앙의 '울룰루 에어즈락'을 가는 투어의 미니버스에는 다양한 국적의 여행객들이 있었다.
첫날 점심을 먹으며 투어 멤버 중에 한국인이 한 명 더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서로 인사를 하게 되었다.
호주의 중앙은 대부분이 정말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같은 곳이어서 어딘가에 도착해도 딱히 무언가 할 게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짧은 시간에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그녀도 회사를 퇴사하고 나왔는데 우연히 나와 같은 그룹사 중 하나의 후배여서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그녀는 2년의 계획을 가지고 여행을 떠나왔고 호주의 여행이 끝나면 남미로 갈 거라고 했다.
'남미'
사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이왕 나온 김에 그동안 내가 영화나 TV, 책등에서 봤던 보고 싶었던 곳을 가야지 하는 두리뭉실한 계획은 있었다.
그중에 남미는 없었다.
그곳에도 내 호기심을 끄는 곳들이 몇 곳 있었지만 그곳에 가볼 거라는,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었다.
그냥 그곳은 정말 꿈같은 곳이었다. 그곳에 가는 건 남의 이야기였다.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이었다.
그런데 호주 중앙의 신기한 광산도시인 '쿠버피디'의 지하 숙소에서 그녀의 여행이야기와 계획을 들으며 살짝 호기심과 용기가 생겨났다.
다음날 그녀는 일정이 달라 먼저 떠나갔지만 울룰루 여행을 마치고 호주 중앙의 마지막 도시인 북쪽 끝의 '다윈'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
우리는 또다시 밤늦게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나의 남미행에 대한 용기는 조금 더 자라났다.
2009년 1월.
우리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이구아수 폭포'를 보기 위해 아르헨티나의 국경으로 떠났다.
폭포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 세 나라에 걸쳐서 존재하는데 각각 다른 뷰를 가지고 있다.
첫날은 아르헨티나 쪽 폭포를 구경하고 다음날 브라질 쪽에서 보기로 했다.
이구아수 폭포를 보기 위한 마을은 워낙 작고 폭포 이외에는 다른 특별한 것들이 없었다.
첫날 폭포를 보고 온 후 딱히 시간을 보낼 게 없던 우리는 저렴한 호스텔이었지만 그곳에 있던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저녁을 만들어 먹었다.
그리고 함께 노트북에 저장해 놓은 영화를 보았다.
이구아수 폭포가 중요 모티브이지만 정작 이구아수 폭포는 많이 안 나오는 왕가위 감독의 '해피투게더'였다.
"
처음 아르헨티나에 와선 길도 잘 몰랐다.
보영(장국영)이 스탠드를 사 왔는데 근사했다.
우린 스탠드에 그려진 폭포에 가보고 싶었다.
이구아수 폭포란 것을 알아냈고
거기만 보고 홍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길을 잃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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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과수 폭포에 도착하니 보영 생각이 났다.
슬펐다.
폭포 아래에 둘이 있는 장면만 상상해 왔기 때문이다.
영화 해피투게더 중에서
"
영화를 보고 그녀는 내게 춤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아르헨티나 배경 영화답게 극중 나온 탱고 장면 때문이었다.
그녀는 회사의 댄스 동아리 회장을 했을 정도의 고수였지만 짧은 시간 동안 몸치인 나를 바꿔 놓진 못했다.
결국 포기한 그녀에게 나는 평소 궁금했던 여러 종류의 춤들을 보여달라고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얄팍한 춤의 종류를 말할 때마다 그녀는 전주 듣고 노래 제목 빨리 맞추기 게임하듯이 즉석에서 바로바로 시범을 보여주었다.
너무 신기했던 나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것들을 어떻게 다 외우고 있는지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춤은 머리가 기억하는 게 아니고 몸이 기억하는 거예요'
다음날 우리는 브라질 쪽의 이구아수 폭포 구경을 포기했다.
대신 파라과이 쪽의 국경을 넘기로 했다.
이곳에서 국경을 넘으면 파라과이의 '시우다드 델 에스테 Ciudad del Este'라는 도시인데 그곳은 3개국의 접점에 있어서 엄청난 쇼핑의 도시였다.
특히 전자제품이 유명했다.
여행이 길어지며 파일들을 저장할 외장하드가 필요했던 그녀에게 꼭 맞는 곳이었고 전자제품에 대한 관심과 파라과이에 대한 호기심에 나도 따라나섰다.
시우다드 델 에스테는 정말 신기한 도시였다.
아침에 장이 서면 수많은 노점상과 손님들로 길을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 지지만 오후 3시만 넘어가면 마치 유령도시처럼 길에 다니는 사람조차 구경하기 힘들어진다.(치안이 안 좋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마을도 이상한 곳에서 찾은 한국 식당의 욕쟁이 할머니 덕분에 수많은 한식으로 그동안의 향수병을 치유하고 그곳을 떠나는 택시를 탔다.
파라과이의 국경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는 도중 그녀가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조용히 노래를 읊조렸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순간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녀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이 노래를 안다는 것과, 걸어서 국경을 넘는 사람들과 차가 뒤엉킨 이 국경의 다리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이 노래를 불렀을까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 당시 서로 의견 충돌이 있고 조금 냉랭해져 있어서 묻진 않았다.
그 이후 브라질을 조금 더 여행하고 헤어진 후 연락이 끊겨 물어볼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하림의 노래를 듣거나 이구아수 폭포, 해피투게더, 파라과이를 떠올리면 그녀가 읊조리던 노래가 생각났다.
그리고 깨달았다.
'추억은 머리가 기억하는 게 아니고 노래가, 글이, 사진이, 장소가 기억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