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자들
1.
몇 달 전 강릉에 갔을 때 해변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시내의 한 정류장으로 갔다.
버스노선과 도착시간을 찾아보다가 같이 노선표를 보던 두 분의 누님(?)과 눈이 마주쳤다.
해변으로 가는 버스가 이곳에서 출발하는지 확인한 후 한분이 내게 말했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나는 두리뭉실하게 경기도에서 왔다고 답했다.
집요하신 누님은 '경기도 어디요?'라고 한 단계 깊게 들어왔다.
결국 도시를 얘기했더니 깜짝 놀라며 옆의 친구를 가리키며
'저 친구도 거기서 왔어요'
심지어 오전에 나와 같은 고속버스를 타고 오셨다고 했다.
이제 마이크는 나와 동향인 누님에게 넘어갔다.
'집이 무슨 동이예요?'
'옛날 구시가지예요'
(어떻게든 두리뭉실 넘어가 보려는 시도가 뻔히 보이지만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나도 시내 여기저기 다 살았어요'
점점 호구조사가 깊어갈 무렵 누님들이 가려는 해변이 아닌 다른 해변으로 가는 버스가 오는 게 보였다.
'저는 시간이 없어서 먼저 온 버스 타고 갈게요'
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2.
제주를 가기 위해 공항에 왔다.
코로나 시대로 오히려 국내 공항이 붐비기도 하고 평소에도 여유 있는 걸 좋아해서 일찍 도착했다.
체크인과 짐 검사를 마치고 출발 게이트 근처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한 줄에 8개의 자리가 있는 의자는 코로나로 인해 거리두기 때문에 4명만 앉을 수 있었다.
덕분에 눈치 안 보고 한 자리에 가방을 놓을 수 있었다.
잠시 후 옆으로 누군가 오더니 빈자리에 가방을 여러 개 올려놓았다.
가방이 커서 자꾸 내쪽으로 넘어오며 나를 건드렸다.
몇 번을 가방이 몸을 치길래 싫은 기색을 비쳤더니 그제야 인지하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않았지만 어떤 사람인지 슬쩍 인상착의를 살폈다.
연세 지긋하신 것 같은데 아디다스 운동화에 청바지를 입은 모습이 꽤 패셔너블해 보였다.
거리두기를 하다 보니 의자들은 곧 꽉 찼고 자리를 못 잡은 사람들은 여기저기 의자를 찾아다녔다.
그때 수녀 한 분이 우리 의자 라인에서 왔다 갔다 하셨다.
자리를 찾으시는 것 같았는데 결국 가방(?) 아저씨 옆 자리에 살짝 엉덩이를 걸치시다가 다른 자리가 나자 그쪽으로 옮기셨다.
자리를 못 잡고 계속 왔다 갔다 하는 사람 중에 가방에서 머리만 살짝 내어 놓은 강아지 비숑을 들고 다니는 여자도 눈에 들어왔다. 강아지가 모든 게 신기한 듯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잠시 후 탑승이 시작됐다.
뚜벅이에다가 오후 비행기이고 도착 후에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해서 앞쪽 자리에 복도 쪽을 예약했다. 제주행은 짐을 대부분 들고 타기 때문에 늦게 타면 넣을 곳이 없을까 봐 탑승도 줄 서서 빨리 했다.
복도 쪽에 자리에 앉아 있는데 같은 라인에 창가 쪽 분이 오셨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일어나서 비켜주려는데 나에게 창가 쪽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요즘에 자리 바꾸기 잘 안 하는데 비행기 처음 타보는 분인가 생각하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제가 좀 빨리 내려야 해서요'
그때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까만색 아디다스 운동화.
아까 내 옆에 앉아 있던 그분이었다.
'내리는 거 어차피 똑같아요. 어디 가시는데?'
'제가 성산 쪽으로 가는 버스 타야 하거든요'
'내가 제주 사는데 공항에서 성산 가는 버스 금방 타니까 걱정하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요'
더 이상은 거절할 수 없어서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잠시 후 명함을 한 장 건네신다.
'내가 남원에서 귤 농장 하는데 올레길 걷다가 들려서 커피 한잔 하고 가요'
사람들의 탑승은 거의 끝나가는데 아저씨와 내 자리 사이는 계속 비어 있었다.
'요즘 비행기 다 매진이라는데 혹시 여기 한자리만 비어 있다고?'
헛된 바램은 마지막 탑승객에서 무너졌다.
누가 봐도 숨이 차 보이는 수녀님이 아저씨와 나 사이에 앉으셨다.
아까 그 수녀님이셨다.
아저씨가 왜 이리 늦었냐고 묻자 수화물에 문제 생겼다고 해서 갔다 오느라 늦었다고 하셨다.
'이런 우연이 있다고? 이렇게 세명이 같은 자리라고?'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비행기 이륙할 때부터 뒷자리에서 계속 아기가 칭얼대서 신경이 쓰였었다.
이어폰을 뚫고 들어오는 그 소리가 처음엔 아기인 줄 알았는데 강아지 소리였다.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했는데 분명 '비숑'이었을 것이다.
'우연을 가장해 나를 창가 자리로 몰아넣고 모두가 포위를 했다?'
갑자기 갖가지 상상이 머리에서 떠올랐다.
3.
표선에서 남원까지 가는 제주 올레 4코스를 걷고 있었다.
올레길 초반에 무리를 해서 컨디션 조절을 위해서 아주 천천히 걸었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걷던 여자 두 분이 나를 앞질렀다.
사람마다 케바케여서 인사를 하는 분도 있고 아닌 분도 있는데 두 분 중 한 분이 밝게 인사하며 내 앞으로 나섰다.
천천히 걷다 보니 두 사람과도 거리가 벌어질 무렵 해변가의 돌로 된 안 좋은 길이 나타났다.
지도를 보니 평평한 다른 길로 가면 잠시 후 다시 올레길과 만날 수 있었다.
무릎과 발목을 위해서 우회길을 선택했다.
잠시 후 다시 올레 길을 만났고 아까 앞질렀던 두 분과 하필 딱 마주쳤다.
'반칙하셨어요'
라고 아까 밝게 인사했던 분이 다시 말을 건네며 연이어 다른 말을 던졌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뭐지? 낯설지 않은 이 상황은?
나만 모르는 '여행지에서 사람 만나면 질문하는 법'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거기에 첫 번째 챕터가 '어디에서 오셨어요?'인가??
'경기도에서 왔어요'
강릉에서처럼 나는 다시 두리뭉실 전법을 구사했다.
'경기도 어디요?'
(너무 익숙한 두 번째 질문이다. 이쯤에서 물러나지 않을 듯해 보였다.)
'00시예요'
두 사람이 깜짝 놀란다.
'우리도 거기서 왔어요'
이쯤 되면 강릉의 판박이다.
아니 판박이를 떠나서 소름이 돋았다.
(이거 무슨 상황이지?)
심지어 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 같은 곳에서 왔고, 강릉에서처럼 구체적인 동네를 물어 왔다.
몇 번의 질문과 대답 끝에 집이 아주 가까운 곳이고 심지어 다들 토박이였다.
지금이야 도시가 커졌지만 토박이들은 사실 한 다리 건너면 다들 아는 사람으로 엮이는 곳이다.
밝은 목소리의 분도 금세 그걸 깨닫고는
'질문이 더 깊이 들어가면 안 되겠네요'라고 대화를 빨리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녀들은 나를 앞질러 먼저 갔고 나는 다시 내 페이스대로 천천히 걸었다.
누군지, 왜인지 모르지만 나를 감시하는 그들에게 내가 눈치챘음을 들키지 않을 만큼 기존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최대한 그들과 멀어지도록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