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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Y Feb 15. 2024

전남편이 죽었다

그래서 나는 죄인이 되었다


수신:ㅇㅇ할머니

4년만에 휴대폰에 뜬

전 시어머니의 전화번호...


"여보세요"

"야 ...니 새끼들 더는 못 키우겠다

애들 다 니가 데려가라 ....데려가 !! "


흐느끼는 목소리...

"무슨일 있으세요?"

.

.

.

"애아빠가..갔다 멀리"

"네?? 어딜요!!"

"죽었어....이제 나 혼자 못 키우니 니가 데려가라"

그게 무슨말이세요...갑자기 왜 죽어요!!



어릴적의 기억에 항상 머물러있던 나는

늘 우울증과 외로움에 고통받으며

사회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것이 참 쉽지 않았다


19살

대학이 너무 가고 싶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백화점에서 딱 1년만 알바를 해야겠다고 다짐후

일을 하다가 아이들 아빠를 만나게 되었다

성인이 되고

내가 만나게 된 첫 남자

참 따뜻했다


엄마사랑을 받아본 적 없던 나에게

그사람의 엄마또한

너무나 따뜻했다

우리집에 가면

왠지 서먹서먹한 언니와 단둘이 외로움에 사무치는데

그 집이 참 따뜻했다


차로 1시간거리의 장거리 연애를 5년을 하면서

쉬는날에는 늘 따뜻함이 있는 그사람의 집에서

데이트를 했다

나도 그렇게 가족이 되고 싶어 아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3살의 이른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 직후

남편이 될 그 사람이 직장을 그만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제서야 아차!!

나와 사귀는 5년간 한직장을 쭈욱 다닌 나와는 달리

직장을 여러번 옮겼던 지난날들이 스쳐갔다

하지만 이미  첫 아이가 생겼고

한직장을 오래 다니지 못하는 남편을 대신해

나라도 이 좋은 대기업에

오래오래 꼭 !! 붙어있어야겠다 마음을 먹고

시어머니에게 아이양육을 맏기고 일을 이어 나갔다

내가 일하던 곳은 백화점이었는데

(결국 원하던 대학을 가지못하고 계속 일을....)

7시30분까지 츨근/늦으면 11시 퇴근..


집에 돌아오면 아이가 보고싶어

집으로 가지 않고 늘 시어머니집으로 향했고

그러다 시어머니 옆에서 잠들었다 출근하기를 반복

그러다 내가 먼저 말했다

"우리 그냥 다 같이 살까요?"


사실 걸리는것이....시아버지는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지만 한 집에만 살고 있는것 뿐이었는데

그래도 나는 잘 해 낼 자신이 있었다


사람들이 술렁였다 미친거라고

어떻게 시어머니한테 월급을 다 갖다 바치고

용돈 30만원만 받으며 사냐고

나는 딱 하나였다...

내가 내뱃속에서 낳은 나와 핏줄로 이어진

나의 주니어 우리딸

우리딸이 안정된 가정환경에서

편하게 자라기만 하면 되었다


유니폼이 더 어울린다는 말을 동료들에게 들을만큼

내 옷 한벌 신발 하나 사신는것보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벌어서 먹여살려야 하는

내 가족이 더욱 중요했다


4년뒤 둘째를 낳고 살아가는 동안에도

난 여전히 한회사를 다니고 있었으며

여전히 용돈 30만원에 시어머니가 물려준

10년 넘은 낡은모닝 한대가 나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점점...그 집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한번은 시어머니에게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로

남편. 시엄마. 시아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죄송합니다

사죄를 하기도 하였고

10시에 들어오든 11시에 들어오든

지친몸을 이끌고 퇴근을 하고 오면

시어머니가 차려준 따뜻한 밥상을 먹은 남편의

설겆이를 했다


사실 시아버지는 남편과 시누이들이 어릴적

바람을 피우고 가정폭력이 심하여 어머니와 이혼을 하셨었는데

큰딸 결혼 시킬때 아빠가 없으면 안된다고

다시 함치신것이었고

그로 인해 삼남매는 엄마를 중심으로

너무나 똘똘 뭉쳐있어서 엄마가 힘든것을 절대 못 보는 아주아주 효녀 효자들이었다


따뜻함에 반해 그따뜻한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어

결혼을 결심한 것이었는데

결혼하고 보니 결혼은 절대 그런마음으로 선택하는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엄마가 되어주겠다던 시어머니는

결혼과 동시에 "시어머니는 이런거구나"깨닫게 해주었고 남편은 절대 어떤일이 있어도 연애때와는.달리

"애엄마는 그러면 안돼"

"며느리는 그러면 안돼"


시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늘 헌신적인 사람인데

나는 자식이 아니기에

삼남매와 엄마의 헌신과 사랑속에서

나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늘 헤메였던것 같다


결혼후 우울증이 더욱 심해졌지만

나와 같은 아이들을 만들지 않으려면

나의 우울증도 나의 생각도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않고

하루하루를 정말 열심히 살아내야만 했다



시어머니가 우리딸 둘을 봐주시게 되면서는

엄마가 힘들다는 이유로

작은 시누이는

내가 쉬는날이면  시어머니를 본인 집에 와서 쉬게 했다

쉬는날이면 늘 새벽 6시에 시어머니가 나가는 소리가 났고

집에서 하루종일 있으며 삼시세끼를 꼬박 드시는

시아버지는 나의 몫이었다

8시 시아버지 아침

아이들 등원

12시 시아버지 점심

중간 간식

아이들 하원

6시 시아버지 저녁

이렇게 챙기다보면 밤 9시가 넘으면 시어머니와 남편이 돌아왔는데

한번은 시아버지가 방에서 자위를 하고는

그 흔적을 아무렇지않게 쓰레기봉투에 대충 던져둔것을 내가 손으로 만지게 되었고

그날의 그냄세..시아버지 표정...그 촉감...충격은 아직도 잊을수 없다

정말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너무너무 수치스러웠다

내가 이렇게 살려고 이렇게 일찍 결혼했나 싶은데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는 시간이 계속되어도

여전히 나는 20대였다는것이다...


심지어

어느날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보니

우리 아이들.둘은.울고 있고

시아버지가 시어머니를

쇼파에 눕혀놓고 이에서 피가 철철 나도록

때리고 있었다.......

사실 남편은 나에게 둘째가 뱃속에 있을때부터

폭력을 행사했었는데

아 나는 여기서 살면

저 나이까지 저렇게 맞고 살게되는거구나..

나의 미래를 보는것 같았다


거기에 작은 시누이는 농담삼아 자주

"니가 한게 뭐 있니 다 우리.엄마가 애들도 키워주고 돈도 모아주고 해서 산거지 나는 우리 시어머니가 우리엄마같으면 아주 맨날 업고 다니겠다"

이런 말들로 나를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남편은 그런말을 옆에서 들으면서도 늘

실실 웃으며 맞아맞아를 외치던 사람...

 

모든것이 쌓일대로 쌓이고

대화도 잘 안되는 남편을 데리고

맥주 한잔 하자고 하며 진지하게 분가 이야기를.꺼냈다

남편은 비형간염보균자라

술을 한잔도 마시지 못했는데

아무리 맥주집을 가더라도

진지하게 서로 대화할수 없는 이유가

그런 이유이기도 했다...


분가 이야기를.꺼낸후 남편은 더욱 달라졌다

니가 꺼낸 이야기이니 회사를 당장 그만두고

분가하면 너는 집에서 살림이나 하고

나는 생활비로 모든것을 포함해서 100만원 주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렇게 말하면 내 성격에 절대로 분가릉 하지않을거라는 생각에....


9년을 그 집에서 일하면서 용돈 30만원을 빼면

나의 연봉이 거의 4천5백만원대였는데..

그동안 살림하고 함께 합치며 산 아파트 대출금 갚느라

돈이 한푼도 없다는 시어머니는

시누이에게 빌렸다며

본인의 명의로 아파트 전세 하나를 얻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아이들만 생각하자

스스로를 다독여가며 남편의 뜻에 따라 생활비 100만원을 받기로 하고 사직서를 내게 되었다


전직장에서 간간히 알바를 하며 조금씩 돈을 벌고

열심히 지켜보려 했지만

나는 갑작스러운 전적인 육아가 처음이라 버겁고

남편은 남편대로 처음 엄마랑 떨어져 살며

왕처럼 대우받지 못하는것에 버거웠다


나는 사실 사회성도 부족하여

사회셍활 자체가 참 많이 버거웠었다

그나마 일을 잘 하면 칭찬과 포상이 주어지는 회사라

악착같이 잘 하려고 늘 노력했던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에게는 하루하루가 전쟁터에 나가는듯한 느낌이었다

비장하게 각오를 단단히 하고

매 순간순간을 긴장 상태로

그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결코 내가 지금 긴장한것이 아니라 나는 원래 이렇게 사회생활하는데에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는것을 보여주기위해

늘 나를 포장해야했고 늘 피곤했다


그래서 따뜻함이 필요했던것 같다

그냥 편히 숨쉴 수 있는 공간이 나에겐 필요했다

그리고 아 이사람은 내 편이구나~~라는

변함없는 사람이 필요했던것 같다...


훗날 친언니와 이야기를 하다가

언니도 예전에 형부랑 이혼한다고 막 싸우고 그랬었잖아 그런데 그때 어떻게 버텼어??

"그렇게 죽도록 미운데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은데도

시누이가 나한테 뭐라고 할때는

무조건 내편 들어줘서 "



생각해보니

그 긴 시간동안

단 한번도

그런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가 이혼 한 이유중 가장 큰 문제는

죽었다깨나도 내편

이 되어주는 존재가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뭔지 모르는데...

나에게는 어릴적 떠난 엄마와

함께 살지 않았던 새엄마

그리고 엄마가 되어 준다더니

엄마가 되어주지 않은 시엄마

나를 돈 벌어오는 기계쯤?으로 생각하는 시엄마

그렇게밖에 모르는데......

엄마 되는게 나에게는 가장 어려웠다


아보니

낳는다고 다 엄마가 아니고

낳고 키우는 내내 아이와 함께 희노애락을 겪으며

마음이 찢어져도 보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하고..

그렇게 점점 엄마가 되어가는것이었는데...

너무 몰랐다 나는......


결혼또한

쉼을 위한 곳이 아니라

함께 전쟁터로 나아가 헤쳐나가는것임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나는.....



분가후 1년....

결국 우리는 이혼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남편이 시아머니와함께...

나만 딱 빠진 곳에서

키우게 되었고.....

아이들을 절대 안 보여준단말에

이혼후에도 여전히

우울한 나로...

외로운 나로....

살아갈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죽었다고.....

나이 50도 안되서


..

죽었다고......

나한테 그렇게 다 해놓고..죽어버렸다고...

이제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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