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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하 Mar 08. 2020

모든 향수는 기억을 부른다

향수는 없었던 기억을 만들고 있었던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힘이 있다. 어떤 시기에 잘 사용했던 향수는 그 향만 맡으면 향수를 잘 사용했던 시기가 소환되며 추억팔이를 하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향수 중에 어떤 향이 나에게 어떤 기억을 불러 일으키는지 정리해보았다. 향에 대한 기억은 매우 주관적이지만, 개인적으로 느낀 향의 분위기와 기억이기에 공유하고 싶다.


1. Crystal Noir, VERSACE

이런 이미지를 생각하고 산 건 아니었는데... 포스터를 보고 정말 깜~짝 ( ͡° ͜ʖ ͡°) 놀랐던...!

베르사체의 크리스탈 누아르는 2018년 1월에 미국 애리조나로 교육연수를 위해 비행기를 타기 전,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급하게 구입한 향수이다. 이 당시만 해도 향수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었고 향에 대한 취향이 확고하지 않았는데, 향을 맡아보더니 '할아버지 향수 같다'며 질색하는 주변 친구들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이 이후로 향 자체와 향수에 대한 재미를 붙였다.


포스터만 봐도 보이지만, 분명히 가볍게 뿌릴 수 있는 향수는 아니다. 스파이시한 향이 첫인상을 강하게 남기고, 중후한 머스크향이 지속되다가 잔향으로 남는다. 이 향수를 미국에서 정말 매일 매일 뿌리고 다녔는데, 그래서인지 이 향만 맡으면 2주 동안 미국에서 라이더 자켓을 입고 열심히 돌아다니던 내가 생각난다. 이상하게 한국에 있는 지금은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어떤 자리에서 엄청 세 보여야 할 때, 짧은 시간 안에 대중에게 강인한 인상을 남겨야 할 때 찾을 것 같은 향수이다. 개인적으로 보수적인 한국보다는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외국에서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2. Cool Cotton, CLEAN

왼쪽은 구형 보틀이고, 오른쪽이 리뉴얼된 현재 보틀 디자인이다.

클린의 쿨 코튼은 2019년 봄에 두번째 교육실습을 하는 도중에 구입한 향수이다. 평소에 내 취향대로 소장하고 있는 향의 계열이 머스크, 파우더, 우디 계열 밖에 없어서 봄에 뿌리기에는 계절감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쿨 코튼의 첫 느낌은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향이 있다면 이런 향일 것 같은 느낌이다. 봄과 계절감이 맞아서, 그리고 교육실습 중에 집단에서 튀지 않고 잘 어우러질 수 있는 향인 점이 구매동기가 되었다.


사실 클린에서는 쿨 코튼보다 웜 코튼이 더 유명하다. 웜 코튼은 쿨 코튼보다 상쾌함이 덜 하고, 조금 더 파우더리한 비누향이 나는데, 개인적으로는 웜 코튼의 어중간한 상쾌함보다 쿨 코튼의 탁 트인 상쾌함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쿨 코튼의 단점이 있다면 계절감이 너무나 확실해서 봄과 여름이 아닌 다른 계절에는 뿌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만큼 날씨가 따뜻하고, 햇빛이 쨍쨍한 날에 뿌려야 될 것 같은 시원한 향이다. 같이 실습 버스를 타던 친구가 향이 너무 좋다고 뭐 뿌렸냐고 물어볼 정도였으니, 따뜻한 계절에 어울리는 향수임은 확실하다.



3. L'Eau du Trente-Quatre, DIPTYQUE

딥디크의 34번 오드뚜왈렛은 2019년 여름에 가로수길에 있는 딥디크 행사장에 갔다가 랜덤 사은품으로 받게 된 향수이다. 딥디크의 다른 향수들과 다르게 이름이 독특해서 찾아봤는데, 'Trente-Quatre'가 불어로 '34'라는 뜻이었다. 알고 보니 34번 오드뚜왈렛은 딥디크가 생제르망 34번가에 부티크를 연지 50주년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향이었다. 


이 향수는 이름답게 니치향수 부티크가 떠오르는 다양한 플로럴한 향조를 가지고 있다. 꽃향이 중심이 됨에도 불구하고 여름에 뿌리기에 부담스럽지 않아서 자주 손이 간 향수이다. 오드뚜왈렛임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길게 지속되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플로럴 향조가 여름 특유의 초저녁 분위기를 연상시켰고, 저녁 먹고 가볍게 산책하면서 보는 길가의 꽃에서 날 것 같은 향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잔향이 물향으로 남는데, 너무 청량하지 않아서 좋았다. 이 향을 맡아보더니 엄마도 너무 마음에 든다고 해서 지금은 본가에 고이 모셔져 있다.



4. American Cream, LUSH

러쉬의 아메리칸 크림은 올해 1월에 더블린 시내의 러쉬 매장에서 구입한 향수이다. 사실 아메리칸 크림은 향수로 나오기 전에 러쉬의 샤워젤, 샴푸와 트리트먼트 라인으로 먼저 나온 제품이다. 반응이 좋아서 향수로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아메리칸 크림 '샤워젤'과 '향수'의 향을 둘 다 맡아보았는데, 그 둘의 느낌이 많이 달랐다. '향수'가 '샤워젤'보다 더 톡 쏘는 향이 강하고 파우더리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아메리칸 크림 향수는 원래 우리나라에서 판매하지 않아 해외직구로밖에 구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판매하고 있다.


바닐라와 딸기향이 중심 향조라고 하는데, 솔직히 딸기향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딸기향이라기보다는 달콤한 과일이 섞인 향 같았다. 반면에 바닐라 향은 정말 강하기 때문에 추운 겨울에 마음껏 뿌릴 수 있는 향수이다. 그만큼 향조가 따뜻하고 몸에 오래 남아 있는 편이다. 나는 이 향수를 구입하고 아일랜드에서 어학연수를 하면서 계속 뿌리고 다녔는데, 그래서인지 이 향을 맡으면 더블린의 버스 정류장에서 오지 않는 마을 버스를 한없이 기다리는 장면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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