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식당의 음식 맛이 궁금해지듯이, 기차로 오가며 반복해서 지나치는 도시는 무엇을 간직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진다. 프랑스 남부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자주 스친 한 도시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독특하고 낯선 이름 때문일까, 따뜻한 남부의 햇살에 품은 무조건적 동경 때문일까. 밤새 파티를 마치고 새벽에 귀가하는 취객들과 함께 트램을 타고 기차역에 점점 가까워졌다. 어둠 속에서 기다려 도착한 기차는 전광판의 안내와 정반대로 칸이 배치되어 있었다. 기차의 끝에서 끝으로 이동을 해서야 제 칸에 탑승할 수 있었다. 피로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채, 창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자 어느새 기차는 앉은 방향과 역방향으로 ‘님(Nîmes)’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듯, 반대 방향으로 달려 갈리아 로마의 주요 도시인 ‘님’에 도착했다. 기차역을 나와 작은 분수를 시작으로 대로를 따라 심겨 있는 큰 가로수 사이를 지나갔다. 켈트족의 한 일파가 풍부한 수원 근처에 자리를 잡으면서 역사를 쓰기 시작한 도시답게 대로의 끝엔 큰 분수가 있었다. 조각가 장 자크 프라디에(Jean Jacques Pradier)가 제작한 이 분수는 1840년대 도시에 철길이 놓이면서 기차역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맞이할 개선문 역할을 하고 있었다. 1851년에 완공된 분수엔 많은 인물이 조각되어 있다. 중앙엔 머리에 님의 로마 신전(Maison Carré)을 얹은 여성이 서 있다. 이 ‘님’을 형상화한 대리석 조각 주변엔 4개의 수원인 론강(le Rhône) 가론강(le Gardon), 외르강(l’Eure), 레즈강(la Lèze)을 인물화 한 동상이 위치한다. 단어의 성별이 남성인 가론강과 론강은 근육질의 거인으로, 여성인 외르강과 레즈강은 요정으로 조각되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발걸음을 옮겨 점점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굳게 잠긴 성당 두 개를 지나치고 도착한 곳은 아우구스투스 문(la Porte Auguste)이었다. 지금은 문의 형태밖에 남지 않아 금방 지나칠 수도 있지만, 예전엔 높이 9미터, 두께 2미터를 자랑하는 갈리아 로마 지방에서 가장 큰 로마제국의 성문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16년-15년에 지어진 건축물은 로마와 스페인을 잇는 길, 비아 돌미티아(Via Domitia)의 관문 중 하나였다. 40미터에 달하는 성문은 2개의 행인이 지나가는 문과 2개의 더 큰 이동 수단이 지날 수 있는 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네 개의 문을 보며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가며 문화와 교역으로 융성했던 님의 과거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령으로 건설된 성벽은 십여 개의 성문과 80개의 탑을 갖추고 있을 정도로 웅장했다고 한다. 또한 성벽의 목적이 주민의 안전을 위하기보다는 로마제국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건축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건물의 내부를 들여다보면서 관람 위치보다 유적이 조금 낮은 곳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는데, 이는 로마 제국 시기의 지반이 지금보다 1미터 정도 낮기 때문이라고 한다. 1930년에 놓인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동상과 거의 무너져 버린 거대한 문명이 남긴 흔적을 보며 이미 없어진 부분들을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우구스투스의 문을 떠나 길을 걷자 도시 곳곳에 새겨있는 상징이 눈에 띄었다. 악어가 종려나무에 묶여 있는 모습이 어떻게 님을 상징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과거 도시에 악어가 많았나 등 상상력을 가동했지만, 그럴듯한 답을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상징물의 기원은 이집트 원정을 마친 아우구스투스 황제 군대의 일부가 님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승리는 이집트를 상징하는 악어를 종려나무에 묶어놓은 형태로 형상화되었다. 그 후, 1535년 프랑수아 1세가 이와 같은 상징을 도시의 문장으로 하사하면서 공식적인 로고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모습은 프랑스 디자이너 필립 스탁(Philippe Starck)이 1985년에 한 디자인이라고 한다. 로마의 흔적이 뚝뚝 흐르는 도시를 거닐다 과일, 치즈, 올리브 등 다양한 물건을 파는 시장을 구경하고, 로마 신전인 메종 카레(Maison Carrée)로 향했다.
메종 카레의 앞엔 한 무리의 프랑스인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내가 일행이었다면 가이드에게 이 건물의 이름에 관해서 질문했을 것 같다. 이름은 정사각형(carré)의 형태를 한 집인데, 건축물은 직사각형이기 때문이다. 로마 신전의 형태와 이름의 부조화를 풀기 위해서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건물의 이름이 지어진 16세기엔 직사각형이라는 단어가 없었다고 한다. 현재 프랑스어에서 정사각형을 지칭하는 카레(Carré)는 모든 사각형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그리고 직사각형은 긴 사각형(Carré long)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세기 초에 지어진 이 건물은 황제 가족을 위한 종교의식을 치르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공공 집회가 열리는 광장의 남쪽에 지어진 신전은 단을 쌓아 광장보다 높은 지대에 지어졌다. 아마 종교의식이 대중에게 더 극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다. 신전 주위엔 신전 주변 건물을 지탱하고 있던 기둥의 밑동이 남아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잘 보존된 로마 신전을 보면서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전, 로마가 지배한 갈리아 지방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발걸음을 옮겨 광장에서 길거리 악사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연주를 들으며 길에 방치된 개똥을 피해 노트르담과 생 카스토르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et-Saint-Castor)에 도착했다. 1096년에 지어져 수 세기 동안 수많은 유지 보수 공사를 거친 성당은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공사로 가려져 있어 전면 파사드는 아예 볼 수가 없었다. 내부는 동굴같이 어둡고 포근한 느낌이었다. 성당에 잠시 머문 뒤, 가로수가 우거져 있는 수로를 따라 마뉴 탑(La Tour Magne)으로 향했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탑을 보기 위해선 계속되는 오르막길을 올라야 했지만, 고요한 정원에서 들리는 새소리와 주인과 함께 헐떡이며 오르막길을 오르는 강아지들 덕분에 땀나고 숨은 가쁘지만, 마음은 편안한 등산을 했다. 그 끝엔 80여 개의 로마 탑 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탑이 서 있었다. 기원전 400년쯤 골족이 이곳에 18미터가 되는 탑을 쌓았다. 그리고 님이 로마 영토로 편입되며 로마는 이 탑을 개조해 36미터로 탑의 규모를 확장했다. 도시의 영향력을 보여주고, 넓은 로마의 영토를 감시하고 로마와 스페인을 잇는 길을 오가는 이들의 이정표 역할을 하던 탑은 일부 파괴된 채 작은 꽃들이 피어있는 한적한 공간에 놓여있었다. 부서졌지만, 웅장함과 위용을 잃지 않은 탑을 뒤로하고 나무가 가득한 님의 전경을 감상한 뒤, 기차역으로 향했다.
기차역으로 향하면서 원형 경기장을 지나갔다. 23000명이 넘는 갈리아 로마인들이 검투사 경기나 동물 싸움 등을 관람하던 길이 133미터, 넓이 101미터에 달하는 경기장이다. 중세엔 위급상황을 대비한 성채로 활용되었고 교회와 집들이 지어졌다고 한다. 원형 경기장의 원래 모습을 보존하기 위해 경기장에 있던 모든 건물은 철거되었고, 현재 투우, 콘서트, 및 스포츠 경기가 펼쳐지는 곳으로 활용 중이라고 한다. 로마 원형극장을 한 바퀴 돌고 난 뒤, 원형 경기장 앞에 놓인 무대에서 리허설하고 있는 래퍼의 랩을 들으며 기차역에 도착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치하에서 전성기를 맞이한 님에서 그리스도교화 되기 이전의 갈리아 지방이 품고 있었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