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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bino Dec 27. 2023

크리스마스의 수도, 스트라스부르

 11월 말, 프랑스 도시들은 크리스마스가 목전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을 길을 걷는 모든 이에게 알린다. 길은 노랗고 하얀빛으로 물들었고, 학교 앞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풍기는 맛있는 냄새는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달콤한 뱅쇼(vin chaud) 향기와 쿰쿰한 라클렛(raclette) 치즈 냄새를 맡으며 하교하면서, 어떻게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더 즐길 수 있을지 생각에 잠겼다. 그러기 위해선 크리스마스의 수도라고 불리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 가야겠다고 확신했다.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유명한 독일에 인접한 알자스 지방의 중심 도시인 스트라스부르에선 프랑스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동시에,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 결국 기차를 타고 우울한 유럽의 겨울을 내달려 스트라스부르로 향했다. 더 많은 마을을 스쳐 지나갈수록 동네 가운데 솟아 있는 성당은 더욱 독일스러워졌다. 어느새 안내방송에서 독일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차는 스트라스부르역에 도착했다. 



 크리스마스의 수도에서 가장 먼저 가고 싶은 곳은 노트르담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Strasbourg)이었다. 기차역 앞 광장을 벗어나 골목에 들어서자,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며 이스라엘을 향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시위대를 맞닥뜨렸다.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시위대를 뚫고 지나갈 수 없었기에 다른 골목으로 우회해서 도심으로 점점 깊숙이 들어갔다. 거리에 관광객들과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이 많아지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설렘을 느낀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중국인 흉내를 내는 인종차별을 당하며 들뜬 마음이 다시 가라앉았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독특하고, 동유럽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분위기를 풍기는 건축물을 지나 성당 앞에 열린 작은 크리스마스 마켓에 도착했다. 흐린 날씨로 인해 크리스마스 마켓의 가게들은 더욱 환하게 황금색으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가게 앞은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인파를 뚫고 성당 입구를 찾았다. 하지만 끝을 알 수 없이 길게 늘어선 줄을 발견하고 맨 뒤로 가서 성당에 들어가려는 행렬에 합류했다. 추운 바람과 부슬부슬 내리는 비로 입장을 포기할까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대성당이 위치한 장소는 너무 중요했다. 스트라스부르 도시 역사는 로마제국 군영이 이 지역에 자리하면서 시작했다. 군영의 중심엔 당연하게 전쟁의 신, 마르스 신전이 위치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 중심에 우뚝 솟은 신전의 자리엔 대성당이 지어졌기에, 스트라스부르의 심장에 서있는 대성당을 꼭 보고 싶었다. 3세기에 달하는 대성당의 건축 기간에 비하면 이 정도의 기다림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두운 날씨에 더욱 빛나는 크리스마스 마켓


 시간이 지나며 점점 성당 입구에 가까워졌다. 정면 파사드 앞에서 입장을 기다리며 성당 외관을 구경하는데 목이 다 날아가 있는 리옹 대성당의 성상들과 달리 이곳 성상은 보존 상태가 매우 좋았다. 1176년에 건축을 시작해서 1439년에 완공된 성당이 완공 이후 안온한 시기를 보냈겠다고 생각했지만, 큰 오산이었다. 유럽에 종교 개혁의 바람이 불면서 스트라스부르가 속한 알자스지방은 개신교 세력 하에 놓였다. 라틴어 미사가 금지되고 성상 파괴 운동이 전개되면서 대성당은 피해를 보았다. 이후, 이 도시를 루이 14세가 수복하면서 다시 가톨릭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면서 구체제의 상징인 대성당은 크게 훼손당했고 성상 파괴 운동은 다시 전개되었다. 성직자 계급을 상징하는 첨탑을 부수자는 이야기도 거론됐다. 또한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부터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해인 1945년까지 스트라스부르를 통치하는 국가가 5번이나 바뀌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당은 큰 피해를 보았다. 프랑스 영토였던 스트라스부르를 프로이센 군의 대포로 포격하며 성당은 파괴되었다. 다행히 1차 세계 대전 중엔 피해를 보지 않았지만, 2차 세계대전 말 스트라스부르에 가해진 엄청난 양의 폭격으로 성당은 다시 큰 피해를 입었다. 유럽 역사의 한복판에서 파괴와 복원을 끊임없이 반복한 성당이 이전보다 더 거대하게 느껴진다. 



첩탑이 하나인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성당 내부는 포근하고 웅장한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거대한 기둥들과 화려하고 웅장한 타피스리 작품들, 그리고 14미터에 이르는 장미창은 성당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도시에 가해진 수많은 폭격으로 인해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으로 제작된 많은 스테인드글라스가 성당을 장식했다. 또한 성당 안쪽에 1574년에 제작된 천문시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수학과 시계 제조업의 걸작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 있었다. 성당 관람을 마치고 나와 성당을 다시 한번 올려다보았다. 처음 성당을 보았을 때 들었던 궁금증이 다시 떠올랐다. 왜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은 첨탑이 하나뿐일까? 스트라스부르의 노트르담 성당은 파리 노트르담 성당을 모티브로 해서 건축되었기에 원래 두 개의 첨탑을 지으려고 했다고 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역사는 몇 가지 가정을 내놓는다. 돈이 부족했다는 주장과 종교개혁으로 대성당이 개신교 세력에게 넘어가며 좌절되었다는 가설, 두 번째 첨탑을 올리기엔 지반이 약하다는 의견이 공존하고 있다. 이유가 어떻든 142미터를 자랑하는 첨탑인 독특한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더 오래 남지 않을까 생각한다.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어부, 제분업자, 무두장이들이 살던 작은 마을인 쁘띠 프랑스(La Petite France)로 자리를 옮겼다. 강이 흐르는 목가적인 주택을 풍경 삼아 거닐며 크리스마스 장식을 파는 가게를 구경했다. 도시를 한 바퀴 돈 뒤, 발걸음은 스트라스부르에서 가장 큰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는 클레베르 광장(la Place Kléber)으로 향했다. 매년 이백만 명의 방문객이 찾는 명소답게 인파에 휩쓸려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했다. 추위를 가시기 위해 줄 서서 간신히 뱅쇼(vin chaud) 한 잔을 샀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해 뱅쇼 만드는 기계엔 기름통처럼 생긴 용기에 담긴 와인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뱅쇼를 마시며 30미터가 넘는 트리에 불이 켜지는 걸 바라보고 미리 싸 온 삶은 계란을 먹으면서 배고픔과 추위를 달랬다. 이 도시에서 사람들은 언제부터 크리스마스 마켓을 즐기기 시작했을까?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스트라스부르 크리스마스 마켓은 1570년 12월 6일쯤 대성당 근처에서 성 니콜라 시장(le Marché de la Saint-Nicolas)이 열렸고 사람들이 아이에게 선물을 주었다고 한다. 종교개혁 시기엔 시장의 이름이 ‘성 니콜라 시장’에서 ‘아기 예수 시장(le Marché de l’Enfant-Jésus)’으로 바뀌며 맥을 이어갔다. 해가 지나면서 크리스마스 마켓 장소는 바뀌었지만 4세기 동안 매년 열리고 있다. 현재는 도시 곳곳에서 많은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고 있다고 한다. 도시에 어둠이 내릴수록 스트라스부르는 크리스마스의 수도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드러내며 아름다워졌지만, 기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역으로 돌아왔다. 



쁘티 프랑스 전경과 클레베르 광장의 트리와 뱅쇼

 크리스마스의 수도를 떠나는 기차를 타자 뱅쇼가 남긴 약간의 취기가 졸음을 몰고 왔다. 프랑스와 독일의 쟁탈전으로 뺏고 빼앗기는 갈등의 역사는 스트라스부르의 정치인, 알랭 퐁타넬(Alain Fontanel)이 언급했듯이 스트라스부르를 ‘가장 독일적인 프랑스 도시이자, 가장 프랑스적인 독일마을’로 만들었다. 피의 역사를 안정적인 이중 정체성으로 소화한 도시엔 유럽 의회가 세워지며 유럽 중심도시로 자리매김했다. 오랜 갈등의 상처가 잘 봉합된 스트라스부르를 거닐며 동양인을 향한 인종차별을 당하며 여전히 다름으로 인해 생기는 끊임없는 갈등과 공존의 어려움을 다시 한번 느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스트라스부르는 많은 사람에게 자신이 간직한 다양성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우리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이 무엇인지 묻고 있는 듯했다. 기차의 진동으로 너무 졸린 나머지 도시가 불어넣은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제 생각에 스트라스부르는 가장 독일적인 프랑스 도시이기도 하고 가장 프랑스적인 독일 도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중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우린 유럽인입니다. 
Strasbourg est sans doute la ville française la plus allemande ou la ville allemande la plus française. Nous avons cette double identité, et nous sommes Européens.
 - 스트라스부르 정치인, 알랭 퐁타넬(Alain Fonta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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