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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bino Jan 02. 2024

어두울수록 밝아지는 도시, 리옹

빛의 도시, 리옹

 청량함으로 가득하던 여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리옹(Lyon)은 춥고 흐린 겨울의 우울함을 가리기 위해 광장에 대관람차를 설치했다. 오후 5시면 밤이 찾아오기 시작하자, 도심의 건물들을 비추고 있는 빛들이 더욱 아름답고 소중해 보였다. 어둠이 내린 도시에서 환하게 빛나는 성당과 시계탑을 눈에 담는 행위는 점점 행복한 습관으로 굳어졌다. 빛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리옹시는 빛축제(La fête des Lumières)를 개최해 도시 곳곳을 밝힐 준비를 했다. 축제가 시작되고, 사람들은 밤을 기다렸다. 하지만 나는 시험으로 곧장 인파 속으로 달려갈 수 없었다. 중요한 시험 하나가 끝내고 난 후에 축제를 즐기러 집을 나섰다. 하늘에선 정체 모를 레이저가 수놓아져 있었고, 시내로 가는 만원 지하철을 타고 프랑스에서 5번째로 큰 광장인 벨쿠르 광장(la place de Bellecour)으로 갔다.



벨쿠르 광장에 설치된 대관람차와 멀리 보이는 푸르비에르 성당



 엄청난 규모의 행렬을 따라 지하철역을 나와 가방 검사를 하고 광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광장에서 주의를 둘러보자 푸르비에르 언덕 위에 세워진 ‘Merci Marie(성모님, 감사합니다.)’라고 적힌 문구가 보였다. 비종교성(laïcité)을 핵심 가치로 삼는 프랑스 사회에서 이 전광판이 비록 성당 부지에 설치되었지만, 매우 생경하게 느껴졌다. 이 문구가 리옹이 내려다보이는 푸르비에르 언덕에 놓인 이유는 빛 축제의 시작과 깊은 연관이 있다. 푸르비에르 성모는 1643년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1870년 프로이센과 프랑스가 전쟁을 벌일 때 리옹인들의 기도를 듣고 그들의 안전을 지켜준 고마운 존재라고 여겨진다. 1840년대 말, 혁명과 봉기를 거치며 푸르비에르 성당은 파괴되었다. 종탑을 재건하는 동시에 그 위에 올릴 웅장한 성모상을 만들기로 했는데, 조각가인 조셉 위그 파비슈(Joseph-Hugues Fabisch)가 그 역할을 맡았다. 종교 관계자들은 동상을 언제 공개해야 할지 고민했다. 성모 마리아를 기리는 날에 동상을 공개하고자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8월 15일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의 생일이자, 그가 교황청을 설득해 자신의 이름과 같은 로마 시대의 순교자, 성 나폴레옹의 축일로 만들고자 한 날이다. 따라서 성모마리아의 탄생일인 9월 8일에 동상을 공개하기로 했다. 하지만 같은 해인 1852년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이 범람하면서 동상을 제작하던 조각가의 작업실도 수해를 입게 된다. 이에 따라, 성모상 공개일은 성모마리아가 잉태된 날이라고 알려진 12월 8일로 미뤄졌다. 공개일 당일, 황금빛이 도는 성모 동상은 대중에게 공개되었지만, 악천후로 예정된 불꽃놀이는 취소되었다. 그때 리옹주민들은 창밖에 불 붙인 초를 내놓기 시작하며 도시는 빛으로 물들었고, 축제는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12월 8일 빛 축제가 이어져 오고 있다. 종교색 짙은 지역 축제는 1989년 도시의 문화재와 경관을 비추기 시작하면서 대중 행사로 변모했다고 한다. 



시청 창 문 앞에 형상화한 초들


 벨쿠르 광장 가운데엔 알록달록한 둥근 풍선 같은 것들이 놓여있었다. 코로나 팬데믹에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풍선 같아 보이는 원형의 물건은 거품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지며 마비된 세상과 그 속에서 무기력하고 쉽게 다칠 수 있는 존재를 표현했다. 역병이 리옹까지 퍼지는 걸 막아준 감사함과 관련된 축제를 보기 시작하면서 즐기기 좋은 작품이었다. 자코뱅파 광장(la place des Jacobins)에서 다른 작품을 감상하려고 한 우리를 막은 건 코로나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인파의 흐름을 철저히 통제했기 때문에 우회할 수 있는 길을 없었다. 다행히 인파 속 모두가 크리스마스 장식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을 맞을 수 있었고, 집 창가에 놓인 촛불 장식도 구경할 수 있었다. 자코뱅파 광장에 다다르자, 분수를 중심으로 수많은 레이저가 솟아올랐다. 레이저들은 서로 교차하며 다양한 공간을 만들었는데 이는 1885년 가스파르 앙드레(Gaspard André)가 제작한 자코뱅파 분수(la fontaine des Jacobins)라는 리옹의 보물을 담는 보석함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제 강가로 자리를 옮겨 건물 벽면에 쏜 빛들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걸 보았다. 물에 상체는 곰이고 하체는 물고기인 생명체도 떠내려가고 스마트폰도 나오길래, 스마트폰 중독을 경고하는 작품인가 추측했다. 약간은 괴기스러운 이 작품은 스마트폰을 지척에 두고 자는 현대인들의 꿈을 탐험한 거라고 한다. 그다음 바로 옆에 위치한 대성당으로 자리를 옮겨 독일 예술가들이 만든 테크노 노래를 따라 수많은 모양이 대성당 파사드에서 현란하게 움직이는 걸 관람했다. 도시를 거닐며 더 많은 작품을 보고 싶었지만, 피곤하고 허리도 아파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벨쿠르 광장, 자코뱅파 광장


 다음날, 전날 보지 못했던 작품들을 관람하기 위해 다시 외출을 감행했다. 다양한 작품이 설치되어 있는 떼뜨도르 공원(Le Parc de la Tête d'Or)으로 향했다. 버스로 가고자 했으나 버스 안에 이미 사람들이 너무 많이 타고 있어 더 이상 올라탈 수 없었다. 그렇게 걸어간 공원 앞엔 엄청난 밀도로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인파 속에서 친구들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차, 하늘에서 비가 떨어졌다. 빗방울이 커지고 작아지기를 반복하자 1시간 반 만에 공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공원에서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해 준 작품은 독버섯이 내는 듯한 몽환적인 노래가 흘러나오는 배경에 심어진 인조 식물이었다. 이 식물은 초를 이용해서 빛을 내고 있었는데, 비가 오고 있었다. 관계자분들은 자연과 인간의 대결을 하듯 비 때문에 꺼지는 양초에 연신 불을 붙이며 작품을 지켰다. 발걸음을 안쪽으로 옮기자,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는 빛으로 일렁였다. 아바타 세상에 들어온 듯이 비현실적인 장소를 옮겼다. 두 가지 작품을 더 감상하고 패딩이 비에 젖어 피부에 축축함이 느껴질 때쯤 공원을 벗어났다.



공원 입구, 연못을 배경으로 한 작품, 공원에서 떼로 광장으로 가는 길



 시청 근처에 설치된 작품을 보러 발길을 옮겼다. 버스를 타려고 했지만, 축제로 도로는 통제되어 공원 근처로 버스가 들어올 수 없었다. 걷는 수밖에 없었다. 오는 비를 맞으며 걸어갈수록 청바지와 신발은 자신의 색을 잃어갔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을 때, 푸드트럭에서 핫도그와 추로스를 사 먹으며 고행을 낭만으로 승화하며 40분가량을 걸었다. 테로 광장(Place des Terreaux)에선 리옹에서 활동했고, 처음으로 영화를 발명했다고 알려진 뤼미에르 형제의 작품에 AI 기술을 활용하여 소리와 색을 입히고, 영상 말미에는 기술 발전으로 인류가 앞으로 어떤 스펙터클을 만들어 낼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여운을 남기는 공연이 끝나고, 리옹의 유명 인사들이 그려진 벽인 프레스크 데 리오네(Fresque des Lyonnais)로 갔다. 세계적인 요리가 폴 보퀴즈(Paul Bocuse), 어린 왕자를 쓴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 등이 동화처럼 등장하며 리옹을 풍성한 유산을 쌓은 이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있었다. 작품을 다 본 다음엔 마감 직전인 가게에서 싼 가격으로 산 미지근한 뱅쇼를 먹으며 집으로 향했다. 



리옹을 대표하는 두 인물, 생텍쥐페리와 폴보퀴즈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선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신발과 바지가 더욱 도드라져보였다. 쏟아지는 피로를 느낀 채 찢어질 듯한 평발로 걸으며 집에 점점 가까워졌다. 몸은 힘들었지만, 나가서 작품들을 구경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심코 지나치던 일상의 공간이 빛으로 아름답게 물드는 경험은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시험을 준비하고 치르며 한 곳에 매몰되었던 정신을 잠시 환기하며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주제들에 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몸을 피곤하지만, 마음만은 행복했던 시간은 그간 뒤척이며 깊이 잠들지 못했던 내게 숙면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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