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보다 프랑스에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더 예뻐.” 프랑스에서 순례길을 많이 걸어본 친구 입에서 나온 말이다. 프랑스 순례길에 대한 찬사의 말미에 한 도시를 추천해 줬다. 그 도시는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보는 ‘르 퓌 엉 블레(le Puy en Velay)’였다. 테제베로는 갈 수 없고,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의 일부라는 사실은 방랑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고속철도가 가지 않는 프랑스 곳곳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TER 기차 안에서 점점 노랗게 물드는 나무들이 우거진 강들과 그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성들을 구경했다. 사람보다 동물이 더 많은 시골을 지나 르 퓌 엉 블레에 도착했다. 흐렸던 하늘은 이내 밝아졌다.
추색이 만연한 거리를 걸어 도심으로 향했다. 도시 이곳저곳엔 산티아고 방향을 가리키는 조개껍데기 형상이 놓여있었다. 프랑스인으로서 처음으로 951년에 콤포스텔라 순례를 떠났던 이 지방의 주교가 걸어갔던 방향을 따라, 지금도 많은 사람이 그를 뒤따라 걷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스페인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나는 관광안내소를 찾고 있었다. 결국, 굳게 닫힌 안내소를 발견하고 다른 곳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는데 한 관광객 무리를 마주쳤다. 로마가 갈리아 지방을 지배하던 4-5세기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고 주교가 기거하고 성모가 발현했다는 이 도시에서 그들은 방향을 잃고 배회하고 있었다. « 맥도널드가 어디예요? » 그들이 내게 건넨 이 질문은 두 가지의 면에서 놀라웠다. 이 엄숙한 종교도시까지 미국의 자본주의가 들어왔다는 점과 이 도시에서 그렇게 간절히 찾는 곳이 맥도널드라는 점이었다. 그들의 관광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맥도널드 위치는 도시에 도착한 지 20분밖에 안 된 내가 답하긴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다.
알록달록하고 오래된 건물들을 지나 돌길을 걸어 노트르담 대성당(La cathédrale Notre-Dame du Puy)으로 향했다. 호수 밑에 있던 화산이 폭발하면서 생기 지형에 형성된 도시는 산과 언덕이 많았고, 대성당은 산 위에 지어졌다. 오르막길을 오르며 호흡은 가빠져 이 고장의 특산품인 레이스와 렌틸콩을 파는 상점엔 전혀 관심을 줄 여유가 없었다. 오르막이 끝나고 성당이 가까워지자 수많은 계단이 나왔다. 운동 부족인 자신의 상황을 깨닫고 건강한 삶을 살도록 구원받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입에선 욕이 나왔다. 계단에 앉아 숨을 고르며 앉아있는데, 건물 사이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고생을 보람으로 바꿔주는 기적을 선사한 이 도시에서는 구술 전승에 따르면 다른 기적도 일어났다고 한다. 5세기, 과부인 귀족 여성은 심한 열병을 알았다고 한다. 그녀가 고열에 시달리고 있을 때, 성모(la Vierge)가 나타나 아니스 산(le Mont Anis)으로 가서 성스러운 돌에 누우면 병이 나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그 말대로 하자 병이 나았고, 로마 신전이 있던 자리에 주교의 명령으로 성당이 지어진다. 이 건물은 확장과 개조를 거듭해 19세기에 지금의 모습으로 띄게 되었다. 기적이 일어난 뒤, 수많은 순례객이 이 경사면을 올라가고 있다.
비잔틴과 오리엔탈 문화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성당 입구를 지나서 내부로 들어갔다. 검은 성모자상 앞에서 기도하는 이들이 보였다. 1254년, 7차 십자군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생 루이(Saint Louis)라고 불리는 프랑스 왕 루이 9세는 검은 성모상을 대성당에 봉헌했다. 그 후 프랑수아 1세를 포함한 12명의 프랑스왕이 순례를 와서 이 성모상 앞에서 기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며 성직자 계급과 왕정의 상징인 이 종교유물은 광장에서 불태워졌다. 11세기부터 자리를 지키던 성상이 사라지자 그 자리는 다른 검은 성모자상으로 대체되었다. 동상 앞에서, 화려하게 황금색으로 점철된 경당에 들어가서 조용한 시간을 보낸 뒤, 성당을 나와 벤치에 앉아 챙겨 온 삶은 계란을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즐기는 가족들, 잠시 성당 문 앞에 강아지를 묶어 놓고 대성당을 구경하고 나오는 관광객들을 구경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땐 몰랐다. 가장 중요한 기적을 일으키는 돌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대성당의 작은 성모상을 보았다면 이제 언덕 위에 놓인 커다란 성모상을 보러 갈 차례였다. 숨을 헐떡거리며 올라가, 아름다운 경치로 체력을 다시 충전하기를 반복하며 프랑스의 노트르담 동상을 만나러 갔다. 성모상 내부로 들어가기 직전, 한 중년의 프랑스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이 10살 때 방문했던 도시를 오랜 친구들과 함께 오셨다고 했다. 그동안 도시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사실도 알려주셨다. 변하지 않는 도시에 나의 하루를 저장할 수 있다는 사실에 설렘을 느꼈다. 그리고 성모상 내부로 들어가 성모님의 오장육부를 지나 머리에 이르렀다. 머리엔 왕관 부분으로 올라가 도시의 전경을 관람할 수 있도록 사다리가 놓여있었다. 앞서 올라간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소지품들이 떨어졌다. 내 차례가 되자 성큼성큼 올라갔다. 주머니에서 떨어져 나간 대중교통 카드를 개의치 않고 올라가 도시를 감상했다. 내려올 때가 되자 아찔한 높이의 바닥을 봐 버렸다. 커지는 공포를 애써 무시한 채, 아무렇지 않은 듯이 내려와 사다리가 부서지지 않음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밖으로 나와 동상 근처를 둘러보며 대포를 발견했다. 이러한 대포를 녹여 방금 올라갔다 온 높이 22.7미터, 무게 853톤의 동상을 만들었다. 크림전쟁에서 승리한 나폴레옹 3세는 러시아에게 빼앗은 대포 213문을 제공해 성모상을 제작했다. 1860년에 만들어진 동상은 여전히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세워져 당시 프랑스의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고, 그 높은 곳을 구경하느라 지친 나는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 급하게 카누를 물에 탔다.
카페인으로 각성한 다음 또 다른 언덕을 올라야 했다. 생 미셀 데귈. 암석바위(Rocher Saint-Michel d'Aiguilhe) 위에 세워진 생 미셀 데귈 성당을 보기 위해선 계단 286개를 올라야 했다. 카페인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다리에 강하게 작용하는 중력을 막지 못했다. 순례를 가서 최소 이백만 년 전에 왜 해저 화산을 터뜨려 이런 지형을 만들었는지 투덜대지 않으려면 유산소 운동을 평소에 해야 했다. 다행히 올라가는 중간중간엔 쉴 수 있는 벤치가 있었는데, 풍경 감상을 핑계로 함께 온 가족들에서 뒤처진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할머니와 함께 잠시 앉아 숨을 골랐다. 나머지 구간을 올라가며 약간 어지럼증을 느꼈다. 이러다가 나도 성모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운동 부족으로 기적을 체험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중에 정상에 도착했다. 82미터에 달하는 언덕 위엔 작은 경당이 있었다. 10세기에 미카엘 대천사에게 봉헌된 이 성당은 로마네스크 이전 양식으로 지어졌고, 알록달록한 파사드로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인 최초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순례를 다녀온 이 지방의 주교가 순례를 마치고 성 미카엘 천사를 기리기 위해 지은 성당이었다. 성 미카엘을 기리는 종교의식은 이탈리아에서 5세기말에 생겼고, 그 후 전 유럽에 퍼졌다. 동쪽에서 들어온 문화는 비잔틴 양식을 물씬 풍기는 건축물에서 행해졌다. 12세기, 순례객들이 늘어나면서 성당은 확장 공사를 하는데 이때 아름다운 다색의 입구가 세워졌고, 성당 내부를 장식하는 벽화들이 그려졌다고 한다. 공사가 끝나고 프랑스 왕 샤를 7세, 루이 11세, 샤를 8세가 이곳에 순례를 왔다. 16세기엔 신교 세력이 미카엘 천사상을 파괴하고 프랑스혁명 시기엔 성당이 폐쇄되었다. 시대의 흐름을 겪으며 점점 옅어지고 복원되기를 반복한 벽을 가득 채운 종교화들을 보며 중세의 엄숙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산티아고로 가는 시작점이자 프랑스의 중요한 순례지인 이 도시는 1918년에 완공된 성 요셉 성당(basilique Saint Joseph de Bon- Espoir à Espaly)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수도 없이 오르내리며 쌓인 피로는 아름다운 도시의 풍광과 차분한 분위기로 사라졌다. 도시를 가로지르면서 본 다양한 인종들이 어울려 함께 축구하는 모습은 마음을 평온하게 했다. 인종차별도 없고, 기차역에 하릴없이 있는 동네에서 껄렁한 청소년들도 유료 화장실을 쓰고 나서 모두에게 또 쓸 사람 없냐고 물어보는 친절을 베푸는 곳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스페인 길보다 프랑스 길이 더 아름답다는 친구의 주장은 확인할 길이 없지만, 르 퓌엉 블레라는 공간에 머물면서 영혼의 에너지가 충전되었는지 돌아오는 기차에서도 행복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