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친구 여러분. 수지입니다.
10월의 연휴 첫날, 조금 늦은 9월의 편지를 쓰기 위해 테라로사 청계광장 지점에 앉아 있습니다. 언젠가 평일 오후에 여유가 된다면 꼭 와서 글쓰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곳인데요. 날이 좋아서 그런지 꽤 시끌벅적합니다.
10월의 연휴 내 있던 약속이 줄줄이 깨져서 모처럼 저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있던 일정이 사라지니 연휴가 조금 길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자연스럽게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고민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내린 결정은 첫 번째로는 잘 쉬는 것이고요. 두 번째는 제 루틴을 잘 찾아오는 것입니다. 쉼과 회복 그리고 제자리로 돌아가기에 이틀은 충분하니까요.
밀린 집안일을 하고, 오늘 아침엔 부지런히 보라매 러닝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책을 읽다가 글을 쓰고요. 원래 하던 대로 저녁엔 기도를 하러 교회를 갔다가 수요일부터 출근을 해야 하니 잠깐 이마트에 들러 도시락 쌀 재료를 장 봐올 예정입니다. 쉬는 날도 하는 일이 참 많네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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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은 하고 싶은 말은 쌓여만 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버리는 그런 한 달이었습니다. 바쁘고 또 바빴습니다.
9월 초에는 생일이 있었고, 약 400명이 참석한 전교인 수련회를 치렀습니다. 그 이후에는 진작에 약속 잡아둔 밀렸던 만남을 가졌고 고대하던 끄라비 휴가를 다녀왔으니까요. 그 와중에도 생각은 쌓여가고 찐한 우정을 경험하고 감정을 들여다보면서 눈물도 뿌리고 새로운 친구도 사귀었습니다.
담아둔 이야기를 9월의 편지에 써 내려가보겠습니다.
사실 저는 생일을 참 부담스러워합니다. 어렸을 때는 항상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하자마자 생일이었고, 대학 때도 늘 개강하자마자 생일이었고 최근에는 꼭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있는 시즌에 생일이라서 함께 축하받을 수밖에 없기도 했었는데요. 일 때문이 아닌 이상 단체로 제게 집중되는 상태를 즐기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그런 자리가 꽤나 부담이 되고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다 보니 누군가 제게 돈을 쓰고 마음 쓰는 것에 참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 이번 생일은 좀 달랐습니다.
바쁜 일정을 쪼개어 생일 반차를 쓰고 청주에 내려갔는데 오후 2시부터 제 생일을 위해 생일상을 차려내는 엄마를 보면서 진득한 사랑을 느꼈거든요.
"엄마, 이렇게까지 안 해도 돼. 나가서 먹자니까.
"한 것도 별로 없어. 나가서 먹는 것보다 훨씬 낫지. 엄마 힘 하나도 안 들어."
이 말에 제가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상다리가 부저리게 차려내고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부는데 눈물 글썽이는 엄마를 보면서 제가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을 어디서 경험할까 싶더라고요.
이곳저곳에서 전해주신 사랑에 감사합니다. 그동안 제게 전하지 못하던 마음을 전하기도 하고 오랜만에 들려 온 안부와 저를 생각해서 고른 선물과 필요한 선물을 해준 모든 마음을 기억하고 있어요. 제가 언젠가 "난 참 이런 게 부담돼"라고 했을 때 "다른 사람에게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야." 라며 받는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도록 가르쳐준 누군가에게도 감사합니다.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요!)
전교인 수련회를 하루 앞두고도 실감이 나지 않았어요. 정작 사무국에서 사람들이 도착해 등록을 시작해서야 "아, 이제 하는 거구나." 했다니까요.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눈 깜짝할 새에 저녁이고, 늦은 밤이고 다음날 아침이 되었으니까요.
작년 기준으로 315명 정도를 예상했는데 예상외로 390명 이상이 참석하게 되는 바람에 준비한 식수, 숙박, 차량, 프로그램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수정이 거듭되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돈으로 해결되면 간단한 문제일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기도 했고 여러 이해관계 속에서 마음 상하지 않도록 커뮤니케이션해야 하는 일 그리고 총괄 디렉터로서 모든 상황의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일들이 반복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면서 애를 먹기도 했고요. 아름다운 마무리로 해결하였다고 해도 포기하고 싶거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수도 없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수련회를 진행하는 2박 3일 동안 알아버린 거 있죠.
이렇게 잘 되려고 그랬구나.
라는 것을요.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2년 전 겨울 우리 집 보일러에 고장이 나서 은희집에 하루 묵던 날, 상민(남편)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이직이 되지 않던 길고 긴 세월에 매일같이 교회를 가서 매일같이 이력서를 쓰고, 기도를 하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역할을 하지 않았더라면, 제 동생이 어느 날 교회에 오게 되지 않았더라면... 어쩌다 나는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저는 사람들 많은 틈에 있는 게 힘들어서 늘 예배만 드리고 집으로 도망치던 사람이었는데 말이죠. 시간이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오게 된 게 참 신기해요.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저는 또 배우고 성장하고 깊어졌고요. 아마 저게 2023년 여름은 이 빅 이벤트가 아니면 설명될 수 없겠죠.
9월은 새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오랜만에 새 친구를 사귀었거든요. 언젠가 만나본 적 있는 것 같은 익숙함으로 이야기를 술술 하게 만드는 친구랄까요. 새로운 사람을 자주 만나게 되는 환경 속에 있는 제가 이 일을 특별한 감각이라고 여기게 된 것은, "아, 또래 친구 새로 사귀는 거 이런 거였지." 라는데 눈이 뜨였기 때문이에요.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그 친구가 가진 힘 덕분일 수도 있겠지만, 사회에 나와서는 또래를 사귀게 되는 일이 정말 많이 없잖아요. 그래서 더 인상적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첫인상에서 차가워 보인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거든요. (전혀 그렇지 않은데!ㅎㅎ)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를 술술 하도록 이끌어 내는 힘은 무엇일까 생각도 하게 되었고, 새로운 영역에서 자신의 삶을 꾸려가고 있는 게 제게 자극이 되기도 하고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형성해 가는 게 피곤한 것만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던 일이었어요!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본 적 있나요? T와 F의 사고가 부딪혀서 ('내 안엔 내가 너무도 많아...' 같은) 더 이상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이 '생각이 많다'를 생각하고 있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거죠. 9월의 어느 날,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도무지 마음이 쉴 수 없는 그런 날이요.
밤이 지나도록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선배이자 친구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제가 지금 생각이 많다는 걸 생각하고 있어요. 하라는 대로 할 의향이 있음."
"돌려 말하지 않을게. 그거 아니야. 그래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어."
"네 오케이~. 고마워요 진작 물어볼걸. 제가 이렇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굉장히 즉흥적인 거긴 했는데요. 꼭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각색 있음)
귀가 얇죠? 참.
이 날 가장 큰 지혜는 내가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때 질문할 수 있는 용기를 내본 것이고, 가장 큰 기쁨은 정리해야 하는 문제는 정리하기로 결정했지만 대신에 더 큰 우정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물어보고 서로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서로에게 필요한 말을 해주는 거, 존중하고 신뢰하는 우정이 바로 이런 것 같아요.
정리를 하기로 결정했지만 정리는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요 못했습니다. 하란대로 안 한거죠. 크크.(내 안에 청개구리..) 그리고 또 질문했어요.
"정리는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라고요. 그랬더니 친구에게 이 사진 한 장이 오더라고요. 보통 이렇게 한다고요.
흐트러진 것을 한 데 모으는 것도 치우는 것도 못하겠으니 질서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안되던걸요. 그래서 하나를 놓는다는 건 내가 의지적으로 놓는 건지, 장치에 의해서 놔지는 건지 헷갈리더라고요. 사람의 성향에 따라 주어지는 환경에 따라 다 다르겠지만 의지적으로 놓는 것도 안 되고 장치에 의해 놔 지는 것도 아니라면 지금은 그냥 이대로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유수풀에 몸을 맡긴 것처럼 흐르는 대로 있어보는 거요. 그리고 하던 일을 늘 해오던 대로 하다가 이렇게 평범한 날들이 쌓이면 또 지나있겠지 싶기도 해요. (흐트러진 것을 왜 모으기도 치우기도 싫어?라고 묻는다면... 또 다른 답을 하겠지만요.)
크라비라는 지명이 아직 생소하시죠? (보통 끄라비라고 발음합니다.) 그래서 찾아보았습니다.
https://travel.naver.com/overseas/THKRV297927/city/summary
로컬들의 순박함 O, 천혜의 자연환경이 어우러진 태국의 보석 O.
그런데..
11월~2월에 갔어야 했나 봐요. 비가 정말 많이 왔거든요. '부모님과 함께하는 효도여행에 비가 웬 말. 5월부터 계획한 가족여행에 이러기 있나? 날씨 뽑기 운수대통'으로 시작해서 허탈을 넘어 해탈~ 해버린 변수 여행이 되어 버렸어요. 그런데 정말 묘하게도 이동하는 순간엔 비가 잔뜩 오다가 스폿에 도착했을 땐 비가 안 와서 충분히 즐기고, 선셋 사진 한 장 때문에 예약한 리조트에서 비 때문에 결국 못 볼까 했던 염려도 싹 잊을만틈 환상적인 노을을 보았습니다. 덕분에 밥 먹고 수영하고 한 참을 걷다가 쉬고 이야기하고 이런 날들을 보냈습니다.
물론 여행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누구나 예상하듯 가족여행이란 좋기도 하지만 싫기도 하거든요.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지만 변수가 내 탓이 되어버리는 듯한 무드가 형성돼서 괜한 눈치를 봐야 할 때도 분명 있었으니까요. 아무리 여유로운 일정이었다고 해도 체력의 한계를 금방 느껴버리는 엄마, 아빠와 함께 있으면서 속상한 마음도 감출 수가 없었거든요.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들어버린 건지. 제가 나이 든 만큼 부모님의 세월도 지나버린 거죠. 그렇지만 '언제 또 이런 날들을 보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감사한 것들이 훨씬 더 많았어요.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선 '더 많이 전화를 해야지. 더 부드럽게 말해야지. 더 귀 기울여 들어야지. 잘 대답해 주어야지.' 다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워낙에 태국을 사랑합니다. 태국 방문은 두 번째인데 첫 번째 자유여행의 기억이 너무 좋았거든요. 동남아 음식에 큰 거부감이 없기도 하고요. 방콕의 로컬 젊은이들이 많이 다니는 곳은 찾아다니면 서울과는 또 다른 트렌디함을 만끽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밤의 카오산은 그 어떤 유흥보다 즐겁답니다! 그런데 부모님과의 여행에서는 그런 것을 쫒을 수만은 없어서 과한 일정을 소화하지 않아도 되는 휴양지를 선택했는데요. 요즘엔 투어가 워낙 잘 되어 있어서 반나절 투어를 신청하면 더 큰 자연 속에서 먹고 구경하고 수영하면서 놀 수 있고 저녁엔 편히 쉬면 됩니다. 완전한 쉼을 누리고 도시로 나왔을 땐 오히려 더 힘들어하셨다는..
한 사람당 예산은 140만 원을 쓰지 않았습니다. 방콕보다는 물가 자체가 높지 않아서 방콕-크라비행 왕복 국내선 비행기와 훌륭한 리조트를 예약했어도 넉넉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아직까지 드문 한국인의 인적이 드물고... (이거 메리트입니다.)
혹시나 부모님과의 여행을 계획 중이시라면 크라비 (무조건 패키지로) 추천드리고요. 친구나 가족, 애인과 함께 휴양지 여행을 고민하고 있다면 다소 높은 물가의 발리보다 한 단계 낮춰서 크라비 자유여행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전 확실히 도시 체질인 것 같아요. 적당히 믹스되어야 더 재미있는...) 아무튼 11월~2월 여행으로 추천합니다!
10월은 헬씨걸의 복귀입니다. 건강을 되찾고 싶어요. 그래서 10월 2일 오늘은 첫 러닝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건강한 음식으로 디톡스도 하고 몸을 좀 가볍게 하고 싶은 마음도 크고요.
너는 뭐든 빡세게 하니까 적당히 하라는 친구의 조언을 귀담아들을 예정입니다. 뭐든 과하게 할 생각은 없어요. 10월은 유수풀에 몸을 맡긴 것처럼 맡기고 흐르는 대로 시간을 보낼 거예요. 그러면 잘 쉬고 잠도 더 잘 잘 수 있겠죠.
하고 싶은 말은 많고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던 9월의 이야기를 종료하고 10월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10월에는 해야 할 말을 해야 하는 용기가 필요하고, 내년을 어떻게 보낼지 결정할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하고, 시작한 일을 이어가는 꾸준함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평범한 날을 평범하게 잘 살아보겠습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건 결국 그 평범한 날들의 레이어예요.
9월의 편지에는 음악 선물이 없습니다.
어떤 음악으로 제 마음이 닿을지 모르겠어요.
여기까지 읽으신 분이라면, 음악을 선물해 주시겠어요?
23.10.02.
테라로사 청계광장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