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 차이가 나는 사람과 과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볕 좋았던 어느 오후, 버스 건너편에 앉아있던 대여섯 살 난 여자애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입을 벌리고 잠든 모습이 귀여워 흐뭇하게 바라보던 찰나에 툭, 하고 꼬마애가 쥐고 있던 게 바닥에 떨어졌다. 공주님 밑그림에다 색칠 공부한 종이였다. 밑그림 선 밖으로 튀어나온 색연필 자국을 지우려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나는 몸을 숙여 종이를 주웠다. 버스가 급정차 하는 충격에 아이가 깨자 주운 걸 아이에게 건넸다. 꼬마는 두 손으로 종이를 건네받으며 “고맙습니다”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잠에 취한 와중에 예의 차리는 모습이 못내 귀여워 난 또 피식 웃고 말았다.
찬바람 불던 오늘 오후, 광화문 역 가판대에서 신문을 집어 들고 계산대 입구를 봤더니 문이 닫혀있다. 외풍을 막으려 닫았나보다. 나는 문을 열고 손을 쭉 뻗어 주인 할머니께 천원을 드렸다. 거스름돈 200원을 기다리던 찰나에 뜻밖의 말을 듣게 됐다. “아이고 예뻐라. 나 일어서지 말라고 직접 문 열고 손 넣은 거여?” 우리는 신문 값을 계기로 몇 마디 더 주고받았다. 할머니는 젊은 아가씨랑 오랜만에 이야기하니 기분이 좋다고 하셨고 나는 할머니 립스틱 색깔이 예쁘다 생각했다. 길 물어보는 걸 제외하면 낯선 노인과 대화를 나눈 건 실로 오랜만의 일이다.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고 지낸다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여태 많은 계층을 생략하고 살았으며 심지어 몇몇은 편견 속에 가두기도 했다. 하기야 혈육 아닌 이상 노인과 말 섞을 일이 없을 뿐더러 아이들 이야기는 교사나 강사 친구들 통해서 간접적으로 접해왔으니. 덕분에 라이방 쓴 태극기 군단과 엄마 말 안 듣는 말썽꾸러기들에 대한 파편적인 경험이 확증 편향을 공고히 다졌더랬다. 나는 타자에 대한 나의 몰이해와 한계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이런 의문이든다. 시네마 천국의 토토와 알프레도 같은 비혈연 유사 가족관계가 이 땅에서 성립 가능할까. 그랜 토리노의 클린턴 이스트 우드와 몽 족 소녀처럼 상이한 계층의 두 사람이 편견의 벽을 깨고 마음을 여는 일이 이 땅에서 실현가능할까. (혈연, 학연으로 엮이지 않은 관계라는 걸 전제로 하고) 세대 차이 나는 사람과 과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겐 고민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겠지만 나에겐 중요하다. 특정 연령대라는 이유만으로 행동과 사고를 재단당하는 것만큼 억울한 일이 또 있을까 싶어서. 나 역시 ‘청년’이라는 어떤 특질로 독해 되고 있지만 노인이나 아이에 비해 사고와 행동의 자율권을 부여받은 ‘혜택’을 누리고 있으니. 꼬마의 그림과 할머니의 립스틱이 자꾸 아른거려 별 생각이 다 든다. (2017.11.01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