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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Nov 21. 2023

고양이를 떠나보낸 후 사라진 것들

어느 날부터 검은 바지에 대한 걱정이 사라졌다.


예전 같았으면 검은 바지를 입은 날,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 방에 쏜살같이 달려가서 바지를 벗고 맨다리나 잠옷 차림으로 미오의 환대를 받았겠지만 이제는 검은 바지를 입어도 괜찮다. 반가운 마음이 온 몸으로 느껴지도록 다리에 부비던 인사가 이제는 없다.


고정적인 지출처 하나가 줄었다.


동결건조 간식, 츄르, 사료 등. 종류별 먹거리를 고민하고 일정 금액 이상 결제한 고객에게 증정하는 선물을 고르는 소소한 재미를 느낄 겨를이 사라졌다. 반려동물 쇼핑몰 앱에 담아뒀던 간식을 월급 날 결제하던 습관도 더 이상 습관이 아니게 됐다.


굳게 닫았던 침실의 문을 이제는 열고 잔다.


혼자 살 때는 미오와 모든 곳에서 부대끼며 살았지만 결혼 후 남편의 부탁으로 침실에 펜스를 설치했었다. 신혼집 입주 초반에 펜스 앞에서 녀석이 서글프게 우는 모습을 보는 게 마음 아팠는데. 이제는 우는 녀석이 사라져버렸다. 아침이면 펜스 앞에서 알람처럼 나를 깨우던 녀석의 울음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가사노동이 줄었다.


더 이상 눌어붙은 헤어볼 구토 자국이 집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토 자국을 닦아내던 일 하나가 줄었다. 감자와 맛동산을 캐는 일과도 줄었다. 뭉친 털을 잘라내고, 빗질해주던 일상도, 빗질 시간이 길어지면 성가시다며 나를 밀어내는 발바닥의 감촉도 과거의 감각이 되어버렸다.


늦은 귀가에 대한 걱정이 사라졌다.


녀석은 집을 비우는 시간이 길어지면 칭얼대는 습성이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한편 마음이 아파 너무 늦지 않게 귀가하려 하지 않았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중문 유리를 통해 보이는, 나를 맞이하는 녀석의 실루엣이 사라졌으니까.


고양이가 떠나고 돈 쓸 일이 줄고, 외부 활동에 대한 부담이 사라지고, 집에서 할 일이 줄어들었고, 펜스의 문을 여닫아야 했던 번거로움이 없어졌는데 하나도 기쁘지가 않다. 전혀 홀가분하지가 않다.


녀석이 앉던 자리, 녀석을 위해 할애한 시간과 비용. 이제는 텅 비어 버린 모든 공간과 의무가 무거운 돌이 되어 마음에 내려 앉은 느낌이다. 그 돌은 슬픔의 상자 위를 꾹 누르고 있다. 행여나 누가 이 돌을 들어올리기라도 하면 슬픔과 그리움이 터져 나올 지도 모른다.


많이 아팠던 나의 친구가 무지개 다리 너머 안식을 맞이했다는 사실 하나가 유일한 위안이다. 하지만 그 위안을 뒤집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있어줬으면 하는 이기심이 새겨져 있다. 사랑하고 아끼는 존재를 떠나 보낸 이들은 그 이기심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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