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live, you learn
개인 용무가 있어서 이번 주 저녁 일정을 모두 비워놨는데, 어라. 자료가 저장된 메인 노트북을 회사에 두고 왔네. 오늘은 못하겠네. 에라 모르겠다. 근데 왜 불안하지 않고 신이 나는걸까.
깜보도 간만에 정시 퇴근했다. 배불리 저녁을 먹은 우리는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 냅다 드러누웠다.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고 들려주는 주크박스 타임이 시작됐다. 90년대 히트팝을 허밍으로 불러주다가 요즘 힘들어하는 깜보를 위해 선물같은 노래를 꺼냈다. 내 사춘기를 장식한 보석함을 슬쩍 연 것이다.
어두운 방에 둘이 나란히 누워서 앨라니스 모리셋의 you learn을 들었다. 커다란 액정에 자막을 띄운 채. 난 왜 이렇게 이 노래만 들으면 눈시울이 붉어지는지 모르겠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도 좀처럼 울지 않는 타입인데, 이상하게도 어떤 음악은 재생하는 순간 내 눈물을 무심히 방류시켜 버린다. 물에서 막 건진 물고기처럼 (누워서) 팔딱거리며 춤을 추던 깜보도 사뭇 진지한 얼굴로 가사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중학생때의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며 사랑하고, 아파하고, 절망하고, 박살나도 찬란할 20대를 기대했다. 30대 중반이 된 지금은 이 노래를 들으며 사랑했고, 아파했고, 절망했고, 박살이 났던 20대의 조각들을 떠올린다. 물론 아직까지는 다시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무너진 적이 없어서 40대에 이 노래를 다시 들으면 어떤 마음이 들지는 모르겠다. 부디 지금처럼 애상감 어린 마음으로 회고했으면 하는데.
경험이 최고의 배움이라던데, 어떤 경험은 굳이 이걸 겪어야 할까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다. 가끔은 고통에 허덕이던 이들이 자기를 달래기 위한 수단으로 경험에 배움을 엮은 게 아닐까란 음모론적 생각도 해봤다. 세상은 무심하리만큼 불공평해서 어떤 사람들은 그리 큰 고통을 경유하지 않고도 일정 이상의 궤도에 오르곤 하니까.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핑 도는 건 ‘이 잡다구니들을 겪고도 넌 결국 성장했다’는 결과론적인 독려가 아니라 나와 전혀 접점이 없는 세상 곳곳의 누군가들도 나처럼 사랑하고, 울고, 패배하고, 출혈하고도 묵묵히 살아가고 있다는 인식에서 오는 위로의 감각 때문이 아닐까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