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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mGH Nov 01. 2020

[생각05] 할머니가 아이패드로 그린 그림

본격 할머니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홍보하는 글

올해 나이 87세, 우리 할머니는 "아이패드를 사면서 얼마나 서러웠는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내 돈을 주고 물건을 구매하는데 "딸이랑 같이 오라"는 점원의 대꾸에 자존심이 상했다는 겁니다. 수년 째 행정복지센터에서 컴퓨터 수업을 들으며 나름 IT기기 사용에 익숙해진 할머니지만, 애플 매장에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고 합니다. 코로나19로 수업 운영이 중단되자 답답한 마음에 아이패드라는 새로운 장난감을 구매하려고 했던 것뿐인데 말입니다. 유튜브에서 보니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는 게 재미있어 보였는데, 구매부터 난감했습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림 그리기엔 디스플레이가 좋은 아이패드만한 기기가 없다는 걸 이미 컴퓨터 수업 선생님께 들은 뒤었으니까요. 할머니는 점원의 쓸데없는 걱정을 물리치고, 아이패드 프로는 물론이고 스마트 커버와 애플 펜슬까지 통 크게 질렀습니다. "나이가 많은 할머니들은 어렵지 않겠냐"며 "젊은 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보란 듯이 새로운 도전에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저도 할머니가 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타자 속도나 글 읽는 속도는 제가 할머니보다 빠르니까요. 온라인 쇼핑을 하실 때 개인인증번호를 제가 눌러드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열정과 노력은 그 정도의 차이쯤은 충분히 뛰어넘는 에너지였습니다. 오히려 할머니가 그림 그릴 때 사용하시는 프로 크리에이트를 전 손도 대기 어렵더라고요.


할머니의 그림을 처음 본 건 올해 여름이었습니다. 합정동에서 업무 미팅이 끝난 후 상암동 외가로 넘어가 저녁밥을 얻어먹은 날입니다. 일 년에 추석, 설날 2번 이상 뵙기 어려운 할머니를 만난 나름의 번개였습니다. 할머니가 제가 내어준 건 이른 저녁을 드시고 남은 강된장과 팥밥, 생선 토막 하나, 잘 익은 김치, 그리고 아이패드였습니다.


"할머니, 저도 없는 아이패드는 언제 사셨어요"라며 놀라는데, 할머니는 은근슬쩍 자랑하며 갤러리 폴더를 터치했습니다. 가득 찬 여러 장의 그림은 화사한 색상을 내뿜고 있었는데요. 그 어느 하나 감동적이지 않은 그림이 없었습니다. 푸른 바다를 끼고 있는 야자수 풍경, 파란 하늘에 뜬 꽉 찬 보름달은 특히 완벽한 색감을 자랑했습니다. 미술 실기는 C, D를 연달아 받았던 저마저도 그림 속 안정적인 구도와 쨍한 색채에 마음을 뺏겼을 정도니까요.


언제나 '피곤하다', '지루하다', '지겹다' 같은 부정적 말을 달고 사는 저와 달리, 할머니는 작은 방 안에서 자신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제 DNA 중 4분의 1이 이 하얀 머리의 여성에게서 온 게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요. 부끄럽다면서도 이미지를 한 장씩 넘겨가며 보여주는 우리 할머니는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이후 이번 추석 오랜만에 할머니를 다시 뵈었습니다. 저녁을 먹자마자 할머니의 아이패드부터 구경했는데요. 3달 만에 할머니의 갤러리는 더욱 다채로워졌습니다. 순수한 할머니를 닮은 채도 높은 색상은 여전했고, 명도 표현은 더욱 섬세해졌습니다. 거기에 이젠 인물이 등장하는 멋진 장면도 디지털 캔버스를 채웠습니다. 등장하는 사람들은 선은 투박하지만 표정엔 행복함이 가득 차있습니다. 강아지와 산책을 하거나 감나무를 흔들 때도 입꼬리가 한껏 올라갑니다. 오두막에서 수박을 한입 베어 물 때는 해님마저도 밝은 얼굴입니다.


할머니의 그림은 우리 할머니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보여줍니다. 예술작품들은 우리 할머니가 90년의 가까운 세월 동안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드러냅니다.



이번 추석 할머니는 본인의 그림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페이스북 계정을 연동해 이미지 소통하는 인스타그램의 문을 열었습니다. 가입 과정에서 성별을 입력하는 창을 잘못 선택해 할머니는 성함을 '여유재순'으로 잘못 적었습니다. 할머니는 본명인 '유재순'과 다르다며 '창피하다'며 손을 저었지만, 오히려 더 잘 어울리는 아이디 같습니다. 시간을 들여 자신이 상상하는 세상을 천천히 예술로 구현하는 여유로운 모습이 드러나니까요.


아직은 그림에 해시태그를 다는 것도 어색하고, 때로는 같은 이미지를 2번 연속 올리는 실수도 발생합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으로 사람들과 감정과 생각을 나누고 싶어 합니다. 인스타 계정에서 더 많은 그림을 구경해주세요. 할머니를 응원해주세요. :) 감사합니다.


※'여유재순'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https://www.instagram.com/yeoyujae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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