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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쩔기자 May 03. 2023

공부하지 않을 권리를 찾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

경제기자 엄마의 돈 되는 잔소리⑦


지친 하루였다.      


아침부터 두통에 시달렸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점심 미팅을 했다. 간신히 기사 마감을 하고 오후 4시 퇴근을 해 부랴부랴 너를 픽업하기 위해 피아노학원으로 달려갔다.      


저녁밥을 하고, 밥상을 치우고, 네 공부를 봐주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일기를 쓰려고 의자에 앉은 넌 계속 딴 짓을 했고, 난 모습에 짜증이 밀려왔다. 오만상이 찌푸려졌지. 넌 슬슬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네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2달.      


요즘은 일하는 엄마들이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육아휴직을 많이 쓴다고 하더구나. 난 네 동생을 낳고 복직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아 눈치가 보여 차마 휴직을 하지 못 했다. 그것이 네가 12시에 학교가 끝나도 집으로 오지 못 하고 돌봄 교실과 학원을 가야하는 이유다.     


"난 유치원 보다 학교가 더 재밌어!"     


네 한마디에 안도가 됐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너를 위해 좀 더 긴 시간을 할애하지 못 한 것에 대한 내 마음의 짐도 좀 덜었지. 넌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단단했고, 네 삶의 변화에 멋지게 적응하고 있었다. 그것이 참 감사했는데. 고작 일기 하나 안 쓴다고 너에게 짜증이 잔뜩 내고 있는 내 자신을 마주하고 자책을 했다. 네가 초등학교에 잘 적응을 하니, 그 다음엔 널 남보다 뒤쳐지지 않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생기기 시작했지. 



               

점심 때 취재원과 점심을 먹었다. 싱가포르 주재원으로 꼬박 5년을 살고 한국에 들어온 지 1년밖에 안된 대기업 부장님이었지. 훤칠한 키에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은 누가 봐도 대기업 잘 나가는 부장님 포스가 철철 넘치는 그런 사람이었어.


부장님에겐 중학생 된 자식이 있는데 한국에 돌아올 때 아내와 아들을 싱가포르에 두고 왔다고 하더구나. 홀로 한국에 돌아온 이유는 단 하나, 아이에게 공부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아서였어.


"만약 아이가 한국에 들어오면 반에서 꼴등을 하겠죠. 국제학교에선 애들을 그냥 놀리거든요. 그 등수를 보게 되면 전 아이를 닦달하겠죠. 그 스트레스를 아이한테 주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여덟 살 된 너에게 벌써부터 조금씩 주고 있는 바로 그 스트레스.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 졌다. 요즘 초등학교에선 시험을 보지 않아 등수를 매기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등수를 전국구에 지점을 가지고 있는 학원에서 매긴단다. 사교육 없인 교육에 대해 논할 수 없는 우리나라에서, 일찌감치 사교육에 올라탄 아이들은 경쟁 우위에 서게 되고, 뒤늦게 뛰어든 아이들은 앞선 아이들을 뒤따른다. 초등학교 때까진 너를 과도한 경쟁에 내몰지 않겠다던 내 결심, 네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사실 그 결심이 흔들릴 때가 많다.      


"간신히 적자를 면하고 있어요."     


그 부장님이 말했다. 싱가포르에서 방 한 칸 딸린 집을 렌트하기 위한 비용 월 400만원. 국제학교 등록금은 연 2500만원. 생활비 별개. 대략 계산해도 한 달에 700만원 넘는 돈이 든다는 계산이 나왔다. '내가 네 공부를 하지 않을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 필요한 돈이 월 700만원이겠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한국에서 돈 많은 부자들이 그렇게 싱가포르 국제학교로 아이들을 많이 보내죠.". 부장님이 말했다. 


내가 그 많은 비용을 들여 널 싱가포르 국제학교에 보낸다면 말이야, 사교육 그림자가 깊게 드린 우리나라 교육체제에서 벗어나 널 좀 더 아이답게 키울 수 있진 있을까. 행복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고 하던데, 누군가는 더 행복한 삶을 꿈꾸며 그곳에 돈을 쓴다. 행복을 돈으로 살 순 없지만 돈은 삶을 좀 덜 절망적이게 해주기도 하는 듯 해.      


네 공부하지 않을 권리를 돈으로 사지 못 하니 좀 다른 방식으로 네 권리를 지켜줄까 한다. 


예컨대 널 학원에 좀 덜 보내고 널 공부시키려는 내 강박을 내려놓는 방식. 오늘은 일기를 쓰는 대신 나가서 줄넘기를 하도록 하자. 너희 반에 친구들이 줄넘기 많이 넘기 경쟁이 붙었다고 하던데. 그 정도 경쟁쯤은 건강한 경쟁이라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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