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없는 2가지

Where are you from?

by 김봉란

“Where are you from?”

해외여행 중에 흔하게 들은 말이다.
까만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보고 ‘니하오’라 할까, ‘곤니치와’라 할까, 망설이던 사람들의 친근한 관심 표현이었다. 서로 언어가 달라 딱히 할 말이 없을 때 정겹게 건넨 관용구였다. Korea라고 하면 Oh!, North 인지 South 인지 묻기도 했다.

하지만 늘 그런 호의적인 문장이 아니라는 걸, 루브르 박물관의 화장실 앞에서 알게 되었다. 꽤 연차가 높아 보이는 깐깐한 관리자가 야단치듯 소리쳤다.

“너 대체 어디 나라에서 온 거야!”




7살, 그리고 돌쟁이 아기를 데리고 유럽을 다녀왔다. 남편이 7년 동안 충성한 직장에서 한 달의 휴가를 하사해 주셨기 때문이다. 여행 계획을 짜며 나는 오래도록 동경해온 프랑스를 일 순위에 넣었다.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 예술의 나라, 에펠만큼이나 시민의식이 높은 나라를 꼭 밟아보리라!


혹자는 파리가 아이들 데리고 갈만한 곳이 아니라고, 만만하게 보지 말라했다.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라 귀띔해줬다. 그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과 이방 관광객으로 겪을 풍경은 많이 다를 수 있으니 말이다.

모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랍거나 엉뚱한 실화들을 다루는데 거기에 이런 일화가 소개되었단다. 파리에 대해 환상을 가진 일본인들이 실제로 다녀온 후 너무 실망을 한 나머지 우울증, 실어증에 걸렸다나.

나는 소중한 로망이 다치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불미스러운 일을 겪지 않기 위해 어느 여행 블로거가 올려둔 주의사항을 읽었다.


3가지만 기억하자.

만나면 봉쥬르! 부탁할 때는 실부플레! 감사하면 메르시!

거울을 보며 소리 내어 연습까지 했다.

입장은 수월했다.
땡볕 아래에 대기한 수많은 관광객이 똬리를 틀며 줄지어 있어 언제 저길 들어가나 걱정하던 찰나에 루브르 관계자가 다가와 유모차는 이쪽으로 들어오라며 길을 열어줬다.
또, 장애인과 유모차에게만 허락된 특별 리프트를 타고 신속히 안으로 들어갔다. 약자일 수밖에 없는 아이와 엄마를 비롯한 가족 모두, 예상치 못한 특권을 누렸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다 보면 언제나 긴장모드다. 아이가 배고플까, 다치진 않을까, 보살펴야 하는데 혹여나 갑자기 떼를 부리거나 물건을 잘못 만지는 등 주변에 민폐 끼치지 않기 위해서도 이중으로 신경 써야 한다.

그건 한국에서나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한동안 유행한 ‘프랑스 엄마식 육아’는 엄격하게 아이들을 키운다고 하니, 프랑스 아이들은 코스 요리도 참을성 있게 먹을 줄 안다고 하니, 최대한 우리 아이들을 얌전히 시키려 노력했다. 게다가 여러모로 배려받은 것이 고마워 더 그랬다.

발 디딜 틈 없이 인산인해를 이룬 모나리자 방에서도 오롯이 휠체어와 유모차만을 위한 길이 있었다. 수익률을 계산했을 때 40조 원이 된다는 그 대단한 걸작 앞으로 곧장 걸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까치발을 하고 한참 동안을 앞의 줄이 빠지길 기다리는 동안에 말이다. 그림을 잘 모르지만 셋째라도 낳아 또 오고 싶을 지경이었다.



어느 정도 관람을 끝낸 우리는 넓은 통로 벤치에 앉아 쉬기로 했다. 유모차에 갇혀 손에 쥐어진 사탕을 빨며 참아왔던 아기를 풀어주었다. 답답해하던 아기는 신나게 아장아장 걸어 다니며 자유를 만끽했다. 엄마 아빠는 근질근질했을 다리를 펼치는 아이들을 따라다니느라 분주해졌다.

5분여 지났을까? 한 스태프가 달려와 묻는다. 한쪽 구석에 놔둔 저 유모차가 너의 것이냐? 그렇다고 하니, 저렇게 두면 안 된단다.


아, 소매치기가 많다더니 유모차도 바짝 곁에 두고 간수해야 하는 건가 보다 혼자 생각하고 있는데, 친절한 설명을 덧붙인다.

저렇게 주인 없는 것처럼 놓인 물건은 폭발물로 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유다. 끔찍한 테러 때문에 민감해진 이들의 상처가 보였다. 아, 그래서 개선문 앞에서도 security 상의 문제라며 돌연 입구를 폐쇄해 버린 거였구나. 아, 혹시 그래서, 타려던 지하철역도 갑자기 닫혀 있었던 걸까? 이 모든 상황이 고작 3~4일 방문하는 우리에게 목도된 일인데, 파리에서는 아픈 일상이라니 측은한 마음마저 생겼다.



이제는 정말로 집에 가야 할 시간. 마지막으로 기저귀도 갈고, 수유도 한 번 하고 가야 했다. 유럽에서 아기를 데리고 다니면서 가장 당황스러운 일은 수유실 갖추어진 곳이 잘 없다는 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름 대면 알만한 공공장소 대부분에는 수유실이 번듯하게 갖추어져 있다. 으레, 그곳 대형 박물관이나 미술관에도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수유실을 찾기 위해 nursing room을 문의하면 못 알아듣기도 하고, 심지어 nurse? 어디 아프냐고 물어온 적도 있다.

대한민국이 저출산 극복을 위해 쏟은 수조 원은 사실인 모양이다. 슬프게도 수유실의 유무가 아이를 낳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증명되었지만.

아이에게 젖 물릴 장소가 마땅치 않으니 한적한 곳을 찾아 가리개를 하고 조용히 알아서 처리하는 데 익숙해졌다. 이 좋은 루브르에서도 수유실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침 화장실에 가보니 closed 란다.
문은 잠겨있고, 대신 그 곁에 보조 공간에 기저귀를 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화장실이 고장인가 보네. 잘 됐다.
사람 없는 이곳에서 아이 엉덩이도 닦아주고 수유도 하고 나가면 되겠다. 하나씩 처리하고 가슴을 열어젖히는데 뒤에 또 스태프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정말 루브르에는 스태프가 많기도 하다. 나의 처지를 슬쩍 엿본 그녀는 아, 하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기 돌보는 일이니 존중해주는 듯했다. 프랑스에서는 아이와 관련한 일이라면 대부분 이해해준다고 들었다. 그런데 또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 입구에서 기다리던 남편에게 또 다른 스태프가 말을 건다.

"무슈(아저씨를 존중하는 호칭), 거기 폐쇄된 화장실이란 표시 못 봤냐? 거기에 왜 들어간 거냐? 거기를 닫은 건 다 이유가 있는 거다. 무슨 위험한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고 거길 들어간 거냐? 거기 천정에서 뭐라도 떨어져서 당신이 다치면 어쩔 뻔했냐? 당신은 왜 우리의 규칙을 무시했냐?"

뜬금없이 뺨 맞은 듯한 남편이 당황해서 짧은 영어로 대답했다. 아임 쏘리. 그리곤 멋쩍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웃는 얼굴엔 침 못 뱉는다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여자는 이전보다 더욱더 정색한다.
"무슈! 당신은 어떻게 웃으면서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하는 거냐! 그건 진심으로 미안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지금 우리의 규칙도 지키지 않았으면서! 당신 대체 어느 나라 출신이야? 너희 나라에선 그렇게 행동하느냐?"

화장실에 들어간 건 아니지만, 어쨌든 보조 공간에서 젖을 먹이던 나는 당장이라도 옷을 여미고 나가야 하나, 어찌해야 하나, 저 여자는 미안하다는데 왜 더 화를 내는 걸까? 우리가 동양인이라고 지금, 그 말로만 들었던 인종차별을 겪고 있는 건가? Closed 표시가 있긴 했지만 화장실 안에는 들어가지도 않았고 보조 공간만 사용했을 뿐인데 그 정도로 중죄인 취급을 당할 건 아니지 않나?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기념품 하나 살 겨를 없이, 가시지 않는 불쾌한 여운이 남았다. 아무도 말리지 않겠지만, 내가 다시 파리를 오나 봐라, 혼자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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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의 야경과 퐁피두를 보기 전까지는...

그리고 결정적으로, 현지에 10여 년씩 사신 분들을 통해 이 나라 정서에 대해 듣기 전까진...


교민, 그리고 유학생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나는 그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일단 프랑스인들은 평소에 미안하다는 말을 쉽게 쓰지 않는단다. 최대의 표현이 유감이군요, 정도라고. 그만큼 미안하다는 말에는 천금의 무게가 실리고 책임이 막중해진다는 의미다. 그렇게 중요한 말은 절대 웃으며 뱉을 수 없다. 그런 경우에는 자신을 조롱하는 뜻으로 받아들인단다. 수유실에 이어 프랑스에는 잘 없는 것, 바로 ‘멋쩍은 웃음’이다. 규칙을 중요시하는 이들에게 먼저 허락을 받지 않은 것도 자신을 무시하는 것으로 비쳤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여행은 살아보는 거라는 광고의 문구처럼 우리는 관광지에서의 하루를 지내며 다른 세계를 호되게 부딪혀, 배웠다. 덕분에 막연한 동경으로 남의 나라에서 살고 싶다, 가끔 푸념했던 한숨이 쏙 들어갔다. 이방인으로 다른 나라에서 뿌리내려 살아가는 모든 분들이 대단해 보인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지지고 볶고 글 쓰고 목소리 내면서 어찌 됐건 살아가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어느 나라 출신이냐는 그 질문에 뭐라 대답했느냐고? 부끄럽고 유치하지만 차마 내 나라 이름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 도망치듯 나왔다.


쓰디썼던 경험.

미안한 마음.

마무리가 좋지 않았던 루브르.

생에 다음번이 있다면, 또 보자 빠뤼!



* 본 글은 covid -19가 발생하기 전 2019년에 다녀온 여행을 토대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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