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통어 Apr 12. 2017

마이 와코라, 그레이스

부코바, 탄자니아

 한국에 있을 때, 그레이스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 시니, 엄마가 돌아가셨어......

 그레이스는 울고 있었고, 그저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한 번 스쳐 알게 된 나란 사람이었다.


 그레이스를 찾아 나섰다. 지난 여행길에서 2년이 지나면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놀랍게도 2년이 지나 탄자니아를 다시 올 수 있게 되었고, 30시간만 버스를 타고 가면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황량한 풍경을 지나자 안개가 짙게 깔린 길에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번개로 온 세상이 보랏빛으로 번득번득거렸다. 바위 마을을 지나고 새벽, 다시 시작하는 풍경에는 풍요로움이 가득했다. 이따금씩 집채만한 새가 날아다니고 오릭스 영양마냥 기다란 뿔을 단 소들이 노닐며, 어느 언덕에는 아기 코끼리 형상의 검은 돌들이 박혀 있었다. 붉다 못해 타버릴 것 같은 시뻘건 흙길을 따라 펼쳐진 연두색 녹음진 풍경, 푸르른 호수, 조금은 다른 종류의 새들은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동그란 망고나무 꼭대기에는 한 아이가 우뚝 서서 무얼 그리 바라보는지, 앙드레 지드의 '행복과 관능과 망각'이라는 글귀는 이런 풍경들에서 나온 표현이었을까.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를 번갈아 달려 부코바에 도착했다. 밤새 추위에 굳은 몸으로 버스에서 내려서 동양 무술에 관심이 많은 듯한 동네 청년들에게 발차기 시범을 보이고 있을 때, 많이 듣던 활기찬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 시니이이이이이이이이~

 그레이스 옆에 선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조화 꽃다발을 내밀며, 부코바에 온 걸 환영해요, 하고서는 폭 안겼다. 

 - 네가 올리비아구나!!

 그레이스는 두 딸아이의 엄마이다. 올리비아는 아빠가 없지만 그레이스를 닮아 밝고 사랑스러웠다.

 그레이스가 미리 빗물을 받아놓은 소중한 물 한 바가지로 몸을 닦고 부코바의 접대 음식인 메뚜기와 살짝 데친 커피알을 집어먹으며 서로 상기된 얼굴로 그간의 소식을 주고 받았다. 그레이스는 뒤늦게 중등학교에 입학을 해서 2학년이 되었고, 10대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고 있단다. 돈 벌랴, 아이 양육하랴, 여유가 없을 텐데 도전하는 그녀의 열정이 갸륵하고 자랑스럽다. 다른 과목은 괜찮은데 수학은 도무지 모르겠다며 이야기를 늘어놓는 얼굴은 꼭 소녀 같았다. 


 다음날 그레이스가 학교를 보여주고 싶다고 하여 함께 간 그녀의 중등학교에서 뵌 교장 선생님과 담당 선생님들은 그레이스를 한껏 칭찬하셨고, 그 자리에는 한참동안 웃음이 넘치고 사랑스러운 눈빛들이 오갔다. 이 모든 행복의 기운들은 그레이스가 뿜어내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그녀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들은 밝고 건강하다. 한참 뒤 중등학교를 나와서 오토바이 택시(삐끼삐끼)를 타고 그레이스가 어렸을 때 다녔던 학교이자 월드비전 Lweru 지역개발사업장에서 지원하는 Kilaini 초등학교를 방문했는데, 바야흐로 부코바는 메뚜기 철이었다. 아이들은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메뚜기 채집에 정신이 없었고, 고학년 여자아이들은 둥글게 모여 앉아 메뚜기 손질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들과 아이들 모두 수업을 할 여유가 없었다. 메뚜기를 잡아다 팔면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에 모두들 들판을 뛰어 다니며 부지런히 메뚜기를 모아야 했다.

메뚜기 손질하는 소녀들

 학교를 나와서도 공부를 할 수 없는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찰나, 갑자기 수십 명의 아이들이 내 주위를 빙 둘러싸더니 여리고 고운 목소리로 쑥스럽게 환영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이전에 들어본 적도 없는 천사의 목소리 같았고, 아름다운 목소리에 행복하게 갇힌 나는 마치 영혼이 황홀하게도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 마이 와코라~

 하야 부족어로 쑥스러운 답례를 하고 그레이스와 길을 나섰다. 

 얘들아, 고마워. 

 그레이스, 고마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