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겪어봤으면 조용히라도 있어야겠다
꼭 보셨으면 하는 마음에 드라마에 대한 스포는 넣지 않았습니다.
"미안해."
드라마를 정주행한 후 가장 먼저 연락했던 것은 내 마지막 주변 군인이었다.
주변에 군인이 있을 나이가 아닌데도, 그는 마지막의 막차를 타 결국 내 마지막 군인이 되어주었다.
지난 휴가 때의 대화가 떠올라서였다.
무지는 종종 나를 형편없는 어른으로 만들곤 한다.
<D.P.>는 탈영병 잡는 헌병, 디피의 이야기다.
정해인, 구교환 배우가 출연하고 총 6부작으로 구성되어있다.
콘텐츠, 드라마, 이야기가 하는 역할은 총 3가지인 것 같다.
첫째, 객관화
둘째, 동질화
셋째, 집단화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게끔 도와준다. 스트레스 상황 속에서 콘텐츠 속에서 해결법을 찾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남의 연애 상담은 잘해주지만 자기 연애는 너무 어렵게만 느껴지는 그런 이치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웃픈 이야기지만 신나게 짝사랑을 하던 중 머리로는 결혼까지 꿈꿨는데,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를 보며 헛발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달은 경험이 그 예다.
하지만 때로는 내가 전혀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상황과 공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생생히 그려지는 묘사 속에서 자연스레 주인공이 맞으면 내가 아프고, 주인공이 창피를 당하면 내가 수치심을 느낀다.
외계인이 침공하는 상황은 내 인생에 앞으로 절대 안 생기지 않을까 싶긴 한데,
<콰이어트 플레이스>를 보며 초유의 재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감정을 온몸으로 느꼈다.
(보고 나온 후에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힘을 너무 주고 너무 놀랐다.)
또 이야기, 서사들은 집단을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명량>, <택시운전사>를 본 이후 느껴지는 묵직한 기분은 우리나라라는 정체성을 종종 상기시킨다.
어디에 사는지도 자각하지 못하다가 저런 영화들을 본 이후에야 '아 맞다, 나 이 집단 출신이지' 한다.
결국 콘텐츠는 소위 MECE한 것 같다고 종종 생각하곤 했다.
상호배제하기도 하지만, 결국 전체를 포괄하기도 한다.
딱딱한 경영학 용어이지만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유용하다.
'나'라는 사람을, '너'라는 세계를 알게 하고, '우리'라는 집단을 만들어주는 이야기가 그래서 좋다.
<D.P.>는 두 번째에 속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 여자라는 이유로 알지 않아도 되었던 세상.
'정말 세상이 평등한가?'에 대한 대답은 명확히 '아니'다.
밤거리를 돌아다닐 때에도, 디지털 성폭력을 마주할 때도, 때때로 무례한 질문을 마주할 때도,
여전히 세상은 많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완벽히 평등한 세계는 유니콘과 같은 것을 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더욱 평등해져야만하고,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그 '평등한 세계'를 발명해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안했다.
내가 힘들다고 해서 남이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고, 또 어떠한 폭력도 쉽게 정당화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D.P.>는 이제까지 군대에 가는 동기들의 심란한 마음을 무심히 쳐다봤던 나에게 세련되게 일침을 날려주었다.
그들이 마주하는 부조리와 상황이 어떤 것인지 말이다.
<D.P.>는 준호의 입대 장면부터 시작한다.
준호의 상황은 아름다운 청춘이라 부르기엔 처절하지만, 자신의 모든 사정은 뒤로 한 채 입대해야만 했다.
가족들의 따뜻한 응원을 받지 못하며 입대할 사람들에 대해 처음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연줄있는 놈들의 한발 빼기.
모두가 똑같은 의무를 지지 않는다.
바깥세상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의 한발 빼기는 명확한 부조리 속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스스로 정화하지 못하는 집단, 결국 가장 약자들이 '무엇이라도 해야지' 마음을 먹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이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연출이 두드러진다.
고통스러워하는 준호를 표현하기 위해 감독이 택한 특수 효과,
'절대 바뀌지 않을 부조리'라는 점이 각 층위에서 보이는데, 그 모든 부조리의 원인이 절대 깨지지 않을 돌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연일 넷플릭스 내 한국 콘텐츠 1위를 차지하고 있는 <D.P.>의 인기가 있는 이유는 명확하다.
서사가 예측 불허하면서도 개연성 있다.
각 화가 에피소드 형태로 되어있는데, 기승전결이 명확하다.
준호가 왜 디피 생활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지 설명하고,
각 탈영병들의 서사도 제 3자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풀어낸다.
또 연기가 일품이다.
세련된 연출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디피의 핵심은 '소재'에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들 하지만
얼마 전 '단순 자살'로 처리되었던 병사가 무려 42년 만에 가혹행위에 시달렸던 것이 밝혀졌다고 한다.
또 지난 6월 밝혀진 보고서에 따른 대한민국 군 장병 100명 중 4명이 자살을 생각해본 적 있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연일 보도되는 군 내 성폭력 문제는 또 어떠한가.
세상이 더 많이 바뀌어야 한다.
부조리를 날카롭게 그려내는 힘이 있는 콘텐츠에 응원을 보내는 이유다.
타인의 아픔에 대해 경중을 따지기 보단 모두가 타인의 아픔에 먼저 공감해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