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미진 Apr 21. 2018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워킹맘이 아닌 여성으로,일하는 인간으로서 내 삶이 나아지기 위해

 나는 첫 아이를 낳고 1년은 육아휴직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후 1년은 경기도의 시댁에 아이를 맡겨 평일에는 시댁에서, 금요일부터 일요일 저녁까지는 서울의 우리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형태를 유지했다.

 돌 지나고 바로 어린이집에 보내지 그랬냐는 질문에 답하자면, 가뜩이나 조산으로 7개월만에 태어난 우리 공주는 생후기준으로 돌이 된 시점에도 교정 9개월이었기에 아직 걷지 못했고, 모든 재활F/W이나 소아과 검진에서도 놀라운 Catchup growth를 보였음에도 에미된 입장으로 생면부지 타인에게-그것도 우리 애만 있는것도 아닌 공동생활체에- '우리 애가 이렇게 일찍 나온지라 특별히 발달사항을 잘 지켜봐주어야 합니다'라며 맡기는 것이 불안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건 말이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두번째로는 아무생각 없이 회사 어린이집만 믿느라 회사 밖의 세계에 무지했던 난 동네 국공립/사립 어린이집에 애를 넣으려면 임테기에 두 줄이 뜨는 순간부터 대기리스트에 올려야 한다는 것을 몰랐고, 세번째는 그다지 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나를 설득하는 데 있어 남편과 시어머니의 '손주 봐 주며 용돈 받는 삶을 살고 싶다'는 얘기를 철썩같이 믿었던 것이 문제였다고 말하겠다.

 나는 본사에 근무중이었기에 회사 어린이집을 사용할수는 있었지만 그곳은 만1세, 그러니까 두 돌이 지나야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1년은 누군가가 애를 케어해 주어야만 했다. 약속했던 대로 시어머니께서 아이를 맡아주겠다 하셨지만 1년의 육아휴직 기간 동안 나는 지나치게 아이와 깊은 관계를 가졌었나보다. 그 기저에는1.59kg으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50일간 혼자있으며 한번 제대로 안아주지도 못했던 것과 2kg이 겨우 넘어 집에 왔던 그 모습, 신생아용 배냇저고리가 너무 커서 바둥대던 그 모습이라던지, 속싸개에 싸면 다시 뱃속에도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그 작은 웅크린 몸. 혹시나 장애가 생기는 것은 아닌가 싶어 유명하다고 하는 소아재활, 미숙아전문소아전문의, 심지어는 구글에서 독일 보바스 프로그램까지 검색하며 내 모든것을 아이에게 남김없이 쏟아부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나니 막상 얻게 된 평일의 자유로운 시간이 - 인간은 참으로 얄팍하고 괘씸하다 지금은 아줌마를 써서라도 그 자유시간을 확보하고 싶건만 - 정말 자유의 시간으로 느껴진 것이 아니라 죄책감과 불안함, 그리움, 의무감 등 정확히 명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으로 뒤덮인 시간들이 되었고 결국 나는 친구들을 만난다거나 조금이라도 더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쓰기 보다는 아이를 보기 위해 2,3일 가량은 1시간동안 버스를 타고 시댁에 가서 아이와 놀아주고 재우고 다시 막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곤 했다. 그럼에도 그 와중엔 승진을 위한 포인트를 쌓기 위해 국가기술자격증 시험을 준비했는데(필기, 실기, 실기2  세번의  시험을 봐야했다)왕복 2시간의 지하철- 버스 안에서 기출문제를 풀고 요약집을 외워 기어이 그 시험에 합격을 하고야 말았다.

 이 생활은 1년 이상을 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아이가 할머니와 더 이상 가까워지지 못해서였다. 보통 이렇게 주 양육자가 할머니가 되면 할머니와 애착이 더 강해지고 엄마를 데면데면하게 여긴다는데 우리 딸은 전혀 그렇지가 못했고 저 1년간의 시댁 라이딩 기간 동안 매 주 일요일은 아이도 울고 나도 우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1년이 흐르고 나니 상처에 익숙해지고 아무는 것이 아니라 곪아 터져서 더 이상은 방치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나는 3대가 덕을 쌓아야 당첨된다는 삼성 사내 어린이집 추첨에 뽑히면서 아이를 직접 키우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점점 더 많이 싸우기 시작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